길림성,集安(국내성),태왕릉(太王陵),집안(集安,지안,국내성,吉林성,지린성)
광개토 대왕릉비
고구려의 제19대 임금인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마지막 세 글자를 본떠서 ‘호태왕비’라고도 부르며, 중국 지린 성 지안 현 퉁거우에 있다.[네이버지식백과]
광개토 대왕릉비에는 약 1,775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중 150자 정도는 훼손되어 읽기가 어려운 상태이다.
중국 지린 성에 보관된 광개토 대왕릉비의 높이는 약 6.39미터에 달한다. 이는 보통 키를 가진 남자 어른의 약 4배에 달하는 크기이며, 거대한 돌의 네 면에 광개토 대왕의 업적이 새겨져 있다.
광개토 대왕릉비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 국강상에 있는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으나 한동안은 확인되지 못했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청나라가 만주족에 대한 봉금 제도(거주 금지 조치)를 없애고 난 뒤에 비로소 발견되었다.
비석은 높이만 약 6.39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돌의 네 면에 1,775자 정도가 새겨져 있다. 그중 150자 정도는 훼손되어 읽기가 어렵지만, 자료가 부족한 우리나라 고대 역사를 알아가는 데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비문에는 주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이 담겨 있다. 광개토 대왕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 분의 은혜와 혜택은 하늘에 가득 찼고,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을 가득 덮었다. 옳지 못한 자들을 없애고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하게 하니,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넉넉하고 오곡이 풍요롭게 무르익었다.”
광개토 대왕은 넓은 영토를 개척한 임금으로 유명하지만, 정식 이름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영토를 넓힌 임금(광개토경, 廣開土境)이자 백성을 평안하게 한 훌륭한(평안호, 平安好) 임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이느라 백성들을 괴롭게 한 왕이 아니라 백성을 사랑했던 임금이었음을 표현한 것이다.[네이버지식백과]
광개토 대왕릉비
414년 고구려 제19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아들 장수왕이 세운 비석이다. 사면에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높이 6.39m, 너비 1.35~2m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비석이다.
비문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주몽의 건국 신화를 비롯하여 광개토 대왕에 이르는 역대 왕의 치적과 약력, 그리고 비의 건립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제2부는 핵심 부분으로 대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기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제3부는 묘를 관리하는 수묘인에 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 중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은 제2부의 정복 관련 기사이다. 그중에서도 신묘년 기사는 최대의 쟁점이 되어 왔다. 현재에도 완전한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이 비석이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전체적인 내용은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 과정에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위키백과]
광개토왕릉비
廣開土王陵碑,호태왕비, 好太王碑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 지금의 지안 현 퉁거우)의 동쪽인 국강상(國岡上)에 있는 광개토왕릉 동쪽편에 세워졌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비가 있는 곳의 현재 지명은 압록강 북안(北岸)인 중국 지린 성[吉林省] 지안 현[輯安縣] 퉁거우 진[通溝鎭] 타이왕 향[太王鄕] 타이왕춘[太王村]이다. 주변에는 대형고분과 성터를 비롯한 많은 고구려 유적이 산재해 있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비로, 남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세워져 있다. 높이는 6.39m로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중간부분이 약간 좁다. 아랫부분의 너비는 제1면이 1.48m, 제2면이 1.35m, 제3면이 2m, 제4면이 1.46m이다.
아래에 화강암의 받침대를 만들었는데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4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해 비면에 가로·세로의 선을 긋고 문자를 새겼다. 문자는 비의 4면에 모두 새겨져 총 44행 1,755자로, 이중 마멸되어 전혀 판독할 수 없는 것이 약 140여 자에 이른다.
중국 학자 왕젠췬〔王健群〕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제1면은 11행 449자, 제2면은 10행 410자, 제3면은 14행 574자, 제4면은 9행 369자이다. 각 문자는 당시에 통용되던 예서체에 가까운 서체를 사용하여 장중하고도 위엄이 있어 고구려 독자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특하다. 그리고 문자의 크기는 균등하지 않으나 대략 가로·세로가 14~15cm 안팎이며, 이체자(異體字)와 간체자(簡體字)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비는 발견된 이후부터 주목을 받아, 지안 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 등의 모금으로 비바람의 침식을 막기 위해 1928년에 2층으로 된 비각을 설치했다. 이 비각은 1976년에 낡아서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하여 철거되고, 1982년에는 중국 당국에 의해 대형 비각이 세워져 지금에 이른다.[다음백과]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 또는 태왕릉(太王陵)은 고구려의 제19대 태왕인 광개토태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위키백과]
태왕릉
번호JYM0541은 고구려 제19대 왕 호태왕의 왕릉이다. 호태왕(374-412) 이름은 담덕이고<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능묘의 계단은 돌무지로 쌓인 묘실이며 고분의 높이는 14m이다. 현재 고분의 동쪽 길이는 62.5m, 북쪽 길이는 68m, 서쪽 길이는 66m, 남쪽 길이는 63m이다. 계단 8개, 21층으로 되어있고 아래는 거대한 무덤 돌이 있다. 묘실은 8계단에 있고 무덤길은 서쪽방향으로 되어있다. 묘실은 두 언덕물의 가옥 형상으로 나타내는 석곽이고 두 개의 석관상이 있다. 묘역에는 많은 조약돌이 깔려있고 동쪽에는 제단이 있다. 이곳에서 대량의 기와, '연꽃무늬와당, 그리고 <태왕릉이 산악처럼 견고하고 영원하기를 원한다>라고 쓰인 문자 벽돌을 발굴하였다.[호태왕비석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