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런(桓仁, huán rén)
고구려의 첫 번째 도읍지, 졸본성의 옛터
환런은 먼 옛날 고구려가 첫 번째 도읍으로 삼고 졸본성을 세웠던 땅이다. 버스를 타고 환런에 들어서는 순간 깎아지른 절벽처럼 치솟은 오녀산(五女山)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절벽 위의 평평한 산정이 바로 졸본성의 옛터다. 고구려인들이 이 산 정상에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했다. 궁전으로 추정되는 터와 창고, 병영 및 무덤 등이 대거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식수와 신앙처로 사용하였던 샘도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졸본성을 ‘우뉘 산에 세운 성’이란 뜻에서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고 부른다.
오녀산성은 2004년 지안(集安)의 고구려 문화유적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신령스러운 아우라를 내뿜는 오녀산은 중국인들에게 봄이면 꽃구경, 여름에는 피서, 가을에는 단풍놀이로 인기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졸본성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서 환런을 찾는다. 매년 10월부터 4월까지는 눈이 쌓여서 우뉘 산성으로 가는 등산로가 폐쇄되기도 하니, 헛걸음하지 않도록 주의하자.[인조이중국]
오녀산성(五女山城)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번시 시(本溪市) 환인현(桓仁縣) 오녀산(五女山)에 위치한 산성(山城)이다. 해발 800미터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고구려 특유의 테뫼식 축성 양식을 보여준다.
오녀산성은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남북 길이 1500m, 동서 너비 300m이고, 전체 약 8km이다. 압록강(鴨綠江)의 지류로 비류수(沸流水)로 비정되는 혼 강(渾江, zh:浑江)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은 200m 높이의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되어 왔다. 동쪽과 남쪽의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성벽을 설치하였다.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다.[위키백과]
▼오녀산
(Wunü Mountain, 五女山城)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된다. 중국의 《위서》(魏書) 동이전에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언급되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홀본성(忽本城)이라고 하고, 삼국 시대 관련 다른 기록들은 대체로 졸본성(卒本城)이라 쓰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수도를 홀승골성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고려사》 공민왕조에는 오로산성(五老山城) 또는 우라산성(于羅山城)으로 쓰여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오녀산성의 옛 이름인 우라산성의 발음이 위나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고구려의 국내성은 이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노태돈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서기 28년) 7월조에 기록된 을두지의 발언에서 묘사되는 위나암성의 지형이 오늘날 오녀산성의 모습과 부합해 오녀산성이 졸본성이 아닌 서기 3년(유리왕 22년)에 천도한 국내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집안 지역 천도를 산상왕 재위기로 보며, 졸본성을 환인댐에 의해 수몰된 나합성(喇哈城)으로 비정하였다.[위키백과]
오녀산성(五女山城)
"삼국유사" 기이편에는 고구려의 건국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주몽은 하백의 딸 유화와 천제의 아들 해모수의 아들로서, 동부여 금와왕의 궁궐에서 나고 자랐으나 금와왕의 아들들과 불화하여 마침내 졸본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오녀산성은 바로 그 졸본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환런 현(桓仁縣) 오녀산에 있으며, 높이 200m에 이르는 천연의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산세가 비교적 완만한 동쪽과 남쪽에만 성벽을 쌓았다. 산성의 남북 길이는 600여m, 동서 너비는 130~300여m이며, 성 안에 저수지와 망대, 병영터 등이 남아 있다.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다음백과]
환인 오녀산성(桓仁 五女山城,Wunü Mountain)
박물관을 관람하고 후문으로 나오면 오녀산성으로 가는 셔틀버스 탑승장이 있다. 버스를 타고 15분쯤 산을 올라가 서문 입구(西门入口)에서 내리면 계단이 시작된다. 가파른 계단을 1시간 가량 올라 도착하는 지점이 바로 성의 서문(西门)이다. 서문에서부터 본격적인 고구려 성터 여행이 시작된다. 궁전 터로 추정되는 1호 대형 건축 기지(1号大型建筑基地)를 시작으로 점장대(点将台) 방향으로 걷는다.
중간에 창고, 초소, 군사들의 병영 터가 남아 있다. 식수원으로 사용된 천지(天池)는 2000년간 한번도 마른 적이 없다고 전해 온다. 점장대에 서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문(东门)에서 남문(南门)으로 가는 길에 온전한 형태의 성벽이 180여m 남아 있다. 가장 온전히 보존된 성벽의 높이는 6m이다. 돌을 다듬어 축조한 성벽을 보면 고구려인들의 돌 다루는 기술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으로 내려와서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면 여행이 끝난다.[인조이중국]
졸본성 卒本城
중국 요령성 본계시 환인만족자치현(桓仁满族自治縣)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비정되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석축 성곽. 산성.
북부여에서 남하해 온 주몽(朱蒙)집단은 졸본지역에 정착하여 근거지를 확보하였다. 고구려 초기의 수도에 대하여 광개토왕릉비문에는 홀본(忽本),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졸본’이라고 하였으며, 《위서 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되어 있다.
모두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만주 환인(桓仁) 북쪽에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지목된다. 주몽왕이 비류수(沸流水) 골짜기의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정한 곳으로, 혼강(渾江)을 끼고 있는 비옥한 충적지대이다.
환인분지의 약 800m의 산지에 축조된 오녀산성은 남북 약 1,000m, 동서너비 약 300m의 비교적 규모가 큰 성인데, 동·서·남쪽은 모두 넓적한 돌로 성벽을 쌓았고, 북쪽은 수직에 가까운 벼랑에 의지하여 성벽을 이루었다.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3∼6m이고, 성돌의 크기는 대체로 30×20×35㎝ 정도이다. 부근에는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적석총을 비롯, 많은 고분군이 있다. 이 오녀산성과 주변의 고분군들은 고구려 건국 초기의 국가성격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를 하고 있다.[다음백과]
오녀산성 遼寧 五女山城
中國 遼寧省 桓仁縣城 동북쪽 7㎞의 해발 820m인 오녀산에 위치한 고구려 산성으로, 서남쪽으로는 넓은 환인분지가 펼쳐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大東溝와 이어지고, 동남쪽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渾江이 환인분지로 흘러들고 있다. 산성의 전체적인 평면은 장방형(長方形)이다. 서벽과 북벽, 그리고 남벽의 서측 부분은 깎아지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다. 경사가 완만한 동쪽 및 남벽 동단에 잘 다듬은 성돌로 성벽을 축조하였다.
성돌은 대체로 30×20×35㎝ 크기이다. 밑부분의 석재가 비교적 크며,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석재를 이용하였다. 가장 큰 것으로는 2m 정도의 석판이 있으며, 그 대부분이 천연석을 이용하고 있다. 성벽이 비교적 양호한 부분의 규모는 기저부 폭이 약 5m이고, 밑부분부터 윗부분까지 15층에 높이는 약 6m이다. 층이 올라갈수록 안으로 들여쌓았으며, 성체의 상부 폭은 1.5-2.0m로 일정하지 않다. 남벽 동단의 성벽 기초부는 2m 높이의 굽도리를 조성하고 성벽을 쌓아 올렸는데, 그 기저부 폭은 6m이며, 높이 8m, 상부 폭은 4.2m이다. 서쪽에는 천연 절벽이 이어지고 있어 성벽이 없다. 성안의 지세는 평탄하다.
이 산성의 동쪽과 남쪽에 각각 1개소씩 성문을 시설하였는데, 남문지의 폭은 4.7m이며, 동문지에는 국내성에서와 같이 ‘┛’ 형태의 옹성(甕城)이 있다. ‘천지’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는데, 주변을 장방형의 푸른 벽돌로 쌓았다. 못은 장방형으로 동서 길이 12m, 남북 너비 5m, 깊이 1.1-2.0m이다. 그 안에 물을 저장했는데 못의 북벽 가운데에 출수구(出水口)가 있다.[네이버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