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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12)페루,쿠스코,코리칸차(Coricancha),San Augustin El Dorado 호텔(2019.1.12)

여행복사꽃 2023. 6. 9. 13:41

▼코리칸차

(Coricancha)

코리칸차(Coricancha)는 페루 쿠스코에 있는 잉카 제국 시대의 신전이다. 흔히 태양의 신전이라고도 불리며, 잉카 제국 시대에 가장 중요시되었던 신전이다.[위키백과]

역사

원래 코리칸차의 정식 이름은 '인티칸차' 혹은 '인티와시'였다. 태양신 '인티'에게 봉헌되었으며, 잉카 제국의 최고 중심지였던 쿠스코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다. 16세기에 스페인 군대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기단부는 남아 산토 도밍고 성당을 받쳐주고 있다.

잉카인들은 코리칸차를 지을 때, 그 어떤 접착제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매우 정교하게 깎은 큐브형 돌을 끼워 맞추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런 건축 방식은 조그만 결함이나 금이 간 석재들은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코리칸차를 지을 때 훨씬 더 건축의 난이도가 높아졌다. 잉카 제국은 코리칸차를 지을 때 단순히 종교적인 목적 뿐만 아니라, 잉카 제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제국 전역에서 석재를 다룰 수 있는 장인들을 상경시켜 강제로 노동을 시켰고, 이는 잉카 제국의 지배력이 남아메리카 서부 지역 전체에 고루 미쳤음을 보여준다.

'파차쿠티 잉카 유팡키'가 쿠스코를 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변화시킬 때, 코리칸차에도 극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코리칸차 외부의 벽 전체에 금을 둘렀으며, 신전의 사제들과 부속 건물들의 수를 확충하였다. 신전에서 일하는 수녀들을 위해 금과 은으로 된 꽃병과 가구들을 들여놓았으며, 선대의 사파 잉카들의 미라를 꺼내 황금 마스크와 호화로운 목걸이, 의복, 팔찌, 순금으로 된 망토를 입혀 코리칸차의 성소에 있는 황금 옥좌 위에 안치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벽들은 한 때 순금으로 뒤덮여 있었다. 또한 코리칸차의 안뜰에는 황금 신상들이 가득했으며, 신전 내부의 어딜 가나 보석들과 황금의 찬란한 광채가 번쩍였다. 스페인인들이 이 곳의 모습에 대해 '상상을 벗어난 경외심'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스페인 군대가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포로로 잡고 금을 가져오라고 협박했을 때, 대부분의 황금이 바로 이 곳 코리칸차에서 떼어져 운반되었다.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은 이 곳에 있던 신전을 기단부만 남기고 모두 철거해 버린 후, 대신 산토 도밍고 성당을 그 위에 지었다. 이처럼 잉카 제국 시대의 석조 기단만 남기고 그 위에 유럽풍의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은 당시에 매우 흔한 일이었다. 이후 페루에서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유럽인들이 지은 성당은 계속 무너져 내리기를 반복했지만 코리칸차의 기단부는 계속 굳건하게 서 있었다. 이를 통해 당시 잉카인들의 뛰어난 석조 세공 기술과 건축 기술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코리칸차 근처에는 유적에서 발견된 미라, 황금 신상, 문서들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위키백과]

코리칸차(Coricancha)

1. 소개
코리칸차는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의 한복판에 있던 신전이다. 태양신 인티를 모시는 대신전이자 잉카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성소였으며, 제국 곳곳에서 가져온 황금으로 만들어진 보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잉카 제국 시기 코리칸차의 화려함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순금으로 빚은 라마와 알파카 상들이 들어차 있었다. 게다가 금으로 만든 옥수수와 감자, 그리고 꽃 등 각종 식물들을 만들어 아름다운 정원들을 꾸며놓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침입하고 황제인 '아타우알파'가 사로잡히면서 잉카 제국이 쇠락하며 코리칸차의 부도 모두 약탈당했다. 콩키스타도르의 지도자인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자신의 형제인 후안 피사로에게 코리칸차를 넘겨주었고, 후안 피사로는 그 안에 있던 보물들을 모두 긁어내어 금괴로 주조한 다음 모조리 스페인으로 보내 버렸다. 이후 가톨릭 선교사들은 기존의 태양신앙을 억누르기 위하여 상징적인 의미로 코리칸차를 허물고 산토 도밍고 성당을 지었다. 현재까지 쿠스코 한복판에는 이 산토 도밍고 성당이 있고, 그 아래에 일부 코리칸차 유적을 복원해 놓았으며, 때문에 현대 페루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들 중 하나가 되었다.[나무위키]

2. 파괴이전

전설에 의하면 신화적인 지도자이자 잉카 제국의 시조인 '망코 카팍'은 태양신 인티의 부름을 받고 동굴에서 걸어나와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 태양신은 그에게 황금 지팡이를 주어 그 지팡이가 꽃히는 곳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라고 명했고, 망코 카팍은 여러 형제자매들과 함께 지팡이가 꽃힐 때까지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현재의 쿠스코 지역에 다다르자 지팡이가 쑥 들어갔고, 망코 카팍은 쿠스코에 왕국을 세우고 지팡이가 꽃혔던 바로 그 자리에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코리칸차이다. 코리칸차는 대략 1200년 경 즈음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원래 이름은 '인티칸차'였다. 이후 쿠스코 왕국은 시간이 흐르며 힘을 키웠고, 파차쿠티 황제 시대에 들어서 본격적인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파차쿠티는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하여 조그만 초가집 정도에 불과했던 인티칸차를 황금으로 도배하다시피 만들고 대대적으로 증축하면서 개건하였으며, 이때부터 황금을 의미하는 '코리', 신전을 의미하는 '칸차'가 합쳐진 코리칸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나무위키]

산토 도밍고 성당 성당 내부의 중정

전성기 시절 코리칸차에는 700여 장의 두꺼운 순금판이 벽에 붙어있었다. 각 금판들에는 태양의 신 인티, 달의 여신 마마퀼라, 천둥의 신 일라파, 그리고 각종 별의 신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황금으로 옥수수와 감자 등을 만들어 번쩍거리는 밭과 정원들을 만들었고, 황제는 매년 이 곳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순금 옥수수를 '수확'하면서 신에게 풍요를 기원했다. 정원 옆에는 역시 금으로 빚은 라마와 알파카, 기니피그, 콘도르, 퓨마 등 다양한 동물들의 조각상들이 놓여있어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고 한다. 전성기 시절 코리칸차에는 약 4,000여 명들의 사제들이 상주하고 있었으며, 코리칸차는 수도 쿠스코의 가장 중심지이자 모든 도로들이 뻗어나가는 도로원점이기도 했다. 또한 죽은 황제들의 시신을 미라로 방부처리하여 순금 망토와 마스크 등으로 치장한 후 이 코리칸차 내부의 지성소에 안치하였으며, 각종 축제가 있을 때마다 미라를 데리고 나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대하며 숭배했다. 잉카인들은 미라를 통해서 죽은 황제와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고, 예언자를 앞에 두고 황제의 미라에게 국정에 관련된 질문을 하기도 했다.[나무위키]

코리칸차는 여타 잉카 제국의 건물들과 비슷하게 투박하게 다듬은 돌들을 모양대로 맞추어서 쌓아올려 지었고, 그 위에 짚이나 풀 등을 엮어 지붕을 얹었다. 벽을 이루는 돌들 사이사이에 접착제를 쓰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서 오히려 기본적인 내진설계가 가능했다고 한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돌들은 자기들끼리 흔들리다가 지진이 멈추면 알아서 원래의 자리로 쏙 들어갔고, 덕분에 건물 자체가 한꺼번에 흔들려 붕괴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코리칸차는 크게 4개의 건물이 한 정원을 둘러싸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각이 태양, 달, 별, 천둥의 신들에게 봉헌되었다. 모든 건물들은 말 그래도 황금으로 떡칠이 되어있었고, 개중에서 가장 규모가 거대했던 건물은 당연히 태양신 인티의 성소였다. 인티에게 바쳐진 방 안에는 인티를 상징하는 얼굴이 그려진 거대한 원반 모습의 순금 신상이 모셔져 있었고, 이 신상은 하지 때의 태양빛을 정면으로 받을 수 있도록 교묘한 위치에 놓아져 있었다고 한다. 번쩍거리는 순금 신상에서 반사된 빛은 정확히 황제가 앉는 자리로 모였고, 이는 마치 황제가 후광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켰다고, 또한 코리칸차를 둘러친 두터운 벽은 회색빛 화강암으로 지어졌고, 벽 맨위는 순금으로 만든 큼직한 벽돌들을 쌓아 마무리했다.[나무위키]

3. 성당
그러나 이토록 화려했던 코리칸차도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쳐들어오면서 함께 몰락한다.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황제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제국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렸고, 망코 잉카 유판키 등 허수아비 황제를 내세운 채로 수도 쿠스코를 마음껏 약탈했다. 피사로는 코리칸차를 자신의 형제인 후안 피사로에게 넘겨주었고, 후안 피사로는 코리칸차의 황금판을 뜯어내고 각종 조각들까지 모조리 가져가면서 코리칸차를 싹싹 비워버렸다. 약탈한 보물들은 모조리 항구에 있는 대장간에서 녹여 금괴로 만들어 스페인 본국으로 보냈으며, 이때 얼마나 철저하게 황금을 쓸어갔는지 현재는 당시 코리칸차와 관련된 황금 유물들을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아무튼 후안 피사로와 그 일당들은 금을 약탈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도 함께 헐어버리고 남은 건물을 간이 성당으로 개조했으며, 코리칸차는 이전의 성세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황량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이후 잉카 저항군과의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쿠스코가 거의 전소하다시피 폐허로 전락하자 스페인 식민정부는 쿠스코를 식민풍으로 새롭게 짓기로 결심했고, 가톨릭 선교사들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코리칸차의 석벽 폐허 위에 성당 건물을 지었다.

멕시코에서 건너온 도미니코회의 수사들은 새로운 성당의 이름을 '산토 도밍고 성당'으로 지었고, 1610년에 첫 건물이 완공되어 축성예배를 올렸다. 그러나 이 건물이 1650년에 일어난 쿠스코 대지진으로 무너지자 1680년에 새로운 성당이 또 지어졌고, 이 건물이 바로 현대 쿠스코에 남아있는 건물이다. 18세기에는 바로크풍의 종탑이 새로 지어졌고, 이후로는 별다른 개축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현재까지 쭉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산토 도밍고 성당은 바로크풍과 스페인 식민풍이 혼합된 오래된 성당으로, 총 3개의 신랑(身廊)이 있다. 또한 내부의 제단은 은으로 도금되어 있으며, 성당 내부 곳곳은 화가들이 그려놓은 오래된 성화들로 가득하여 꽤나 아름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나무위키]


Coricancha/Inca Sun Temple

어머니 지구와 잉카 를 묘사한 금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