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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북미(76)미국,뉴욕,자유의여신상(2019.8.10)

여행복사꽃 2023. 9. 13. 22:22

자유의 여신상

Statue of Liberty
미국과 프랑스 간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1865년 프랑스의 에두아르 드 라불레가 건립을 제의했으며, 프랑스 국민들이 기금을 모아 1875년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의 지휘 아래 작업이 시작되었다.
본체는 동판을 두들겨서 모양을 내고 4개의 대형 철제 구조 위에 조립하여 만들어졌다. 높이가 46.1m, 무게가 225t이나 되는 완성작은 1885년 분해한 뒤 배에 실어 뉴욕으로 이송되었고, 1886년 10월 28일 제막되었다.
받침대를 포함한 높이는 92m이고 오른손에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있으며,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진 서판을 들고 있다. 발코니까지 엘리베이터가 운행되며 머리 부분의 전망대까지는 나선형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1924년에 국립기념물로 지정되었다.[다음백과]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과 프랑스 국민들 간의 친목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받침대를 포함해 전체 높이가 92m이고 높이 치켜든 오른손에 횃불을 쥐고 있으며,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는 자유의 선언을 상징하는 서판을 들고 있다. 발코니까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며 거기에서부터 전망대인 머리부분까지는 나선형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다음백과]

자유의 여신상 받침대 입구에 있는 현판에는 받침대를 지을 기금을 모으기 위해 에머 래저러스가 지은 '새로운 거상'(1883)이라는 소네트가 새겨져 있다.
"정복자의 사지를 대지에서 대지로 펼치는/저 그리스의 청동 거인과는 같지 않지만/여기 우리의 바닷물에 씻긴 일몰의 대문 앞에/횃불을 든 강대한 여인이 서 있으니/그 불꽃은 투옥된 번갯불, 그 이름은 추방자의 어머니/횃불 든 그 손은 전 세계로 환영의 빛을 보내며/부드러운 두 눈은 쌍둥이 도시에 의해 태어난, 공중에 다리를 걸친 항구를 향해 명령한다/오랜 대지여, 너의 화려했던 과거를 간직하라!/그리고 조용한 입술로 울부짖는다/너의 지치고 가난한/자유를 숨쉬기를 열망하는 무리들을/너의 풍성한 해안가의 가련한 족속들을 나에게 보내다오/폭풍우에 시달린, 고향없는 자들을 나에게 보내다오/황금의 문 곁에서 나의 램프를 들어올릴 터이니."

받침대 부분에는 미국 이민박물관(1972)이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에두아르 드 라불레가 남북전쟁 후에 자유의 여신상 건립을 제의했다. 프랑스 국민들이 기금을 모았으며 1875년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의 지휘 아래 프랑스에서 작업이 시작되었다.

자유의 여신상 본체는 동판을 두들겨서 모양을 내고 외젠 에마뉘엘 비올레 르 뒤크와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이 고안한 4개의 대형 철제 구조 위에 조립하여 만들어졌다. 높이가 46.1m, 무게가 225t이나 되는 완성작은 1885년 분해해서 배에 실어 뉴욕으로 가져왔다. 미국의 건축가 리처드 모리스 헌트가 고안하고 베들로 섬에 있는 우드 성벽 내부에 건립되었던 받침대는 나중에 완성되었다. 받침대에 올려진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 10월 28일 클리블런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에서 제막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1986년 7월에 개최된 1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미국과 프랑스 양국이 자유의 여신상을 수리 복구했다. 처음에는 조명장치가 되어 있는 횃불이 항해에서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등대국에서 관리했지만, 우드 성이 육군 작전기지였기 때문에 1901년부터는 여신상의 관리를 육군부에서 맡았다. 1924년 국립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1937년 우드 성이 해체되면서 섬의 나머지 부분도 기념물에 포함되었다. 1956년 베들로 섬은 리버티 섬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65년에는 한때 미국의 주요 이민단 정착항이었던 인근의 엘리스 섬도 이에 포함되어 사적지 전체면적이 약 0.24㎢에 이르게 되었다.[다음백과]

맨해튼

Manhattan
미국의 행정구역. 맨해튼 섬을 중심으로 본토의 마블힐 구역에 걸쳐 있으며, 이스트 강의 여러 작은 섬을 포함한다. 허드슨 강, 할렘 강, 스파이튼다이빌 강, 이스트 강, 어퍼뉴욕 만과 접한다. 세계최고의 상업·금융·문화 중심지의 하나로 여겨지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에 속하는 브로드웨이, 금융가인 월스트리트가 있다.[다음백과]

맨해튼은 맨해튼 섬을 중심으로 본토의 마블힐 구역에 걸쳐 있으며, 이스트 강의 여러 작은 섬을 포함한다. 서쪽으로 허드슨 강, 북동쪽으로 할렘 강과 스파이튼다이빌 강, 동쪽으로 이스트 강, 남쪽으로 어퍼뉴욕 만과 접한다. 맨해튼은 종종 뉴욕 시와 동일한 것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1626년 네덜란드의 초대 뉴네덜란드 주 장관 페테르 미노이트가 이 지방의 인디언들(와핑거 연맹의 한 종족인 맨해튼족)에게 60굴덴(당시 은 0.7㎏의 값에 해당)어치의 방물과 옷감을 주고 섬을 샀다고 전해진다. 이미 1653년 뉴앰스터댐 시로 되었으나 1664년 영국인들 손에 넘어가 뉴욕 시로 개칭되었다. 그후 군사·정치 면에서 공화국의 초기 역사에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국회가 이곳에서 열렸고(1785~90), 1789년 이곳에서 조지 워싱턴이 초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19세기, 특히 1825년 이리 운하의 개통과 함께 번창하고 확장되어 대도시의 심장부로 발전했다. 1898년 새로 만들어진 브루클린·퀸스·리치먼드·브롱크스 자치구들과 맨해튼이 합쳐지면서 그레이터뉴욕을 이루었다.

맨해튼은 세계최고의 상업·금융·문화 중심지의 하나로 여겨지며, 흥미거리가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에 속하는 브로드웨이, 금융가인 월스트리트가 있다. 그밖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세계무역 센터, 그리니치빌리지, 할렘, 센트럴 파크, 국제연합(UN) 본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현대미술관, 컬럼비아대학교, 뉴욕시립대학교의 두 분교와 뉴욕대학교 등 다양한 문화·교육 기관들이 있다. [다음백과]

브루클린(영어: Brooklyn)은 미국 뉴욕주 뉴욕의 다섯 자치구 중 하나로 롱아일랜드의 서쪽 끝, 퀸스의 남서쪽에 있다. 1898년 뉴욕 시와 함께 그곳의 합병 때까지 독립 시였던, 브루클린은 250만명의 거주자[5]와 함께 뉴욕 시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자치구이자 지역에서 두 번째로 크다. 만약 브루클린 자치구가 분리된 도시였더라면,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을 것이다. 1896년 이래로, 브루클린은 변함없는 경계를 가지고 있으며, 킹스 군은 뉴욕주에서 현재 가장 인구가 많은 군이자 미국에서 로스앤젤레스군 다음으로, 2번째로 인구가 많은 군이다.
비록 뉴욕의 일부일지라도, 브루클린은 독특한 문화, 독립 예술 현장과 독특한 건축학적 유산을 유지한다. 많은 브루클린 인근은 특별한 인종 그룹과 문화가 두드러지는 민족 거주지이다.[위키백과]

브루클린은 식민지시절 당시 당시 커나시 아메리칸 인디언 종족이 크게 거주한 롱아일랜드의 서부 언저리에 놓인 지역으로 정착하는 데 네덜란드인들이 첫 유럽인들이었다. 첫 네덜란드인의 정착은 1634년에 설립된 미드부트 (미드우드)였다. 네덜란드인들은 또한 1630년대에 거와너스, 레드후크, 브루클린 해군 공창과 부시위크를 둘러싸인 대지를 모호크 족들로부터 매입하였다. 브뢰컬런 마을은 1646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하여 권한을 부여받았고, 현재 뉴욕주에서 첫 지방자치체가 되었다. 당시 브뢰컬런은 뉴네덜란드의 일부였다.

1664년 네덜란드인들은 영국의 뉴네덜란드 정복에서 브뢰컬런을 잃었다. 1683년 영국인들은 뉴욕의 영령 식민지를 12개의 군들로 재결성하여 각각의 군은 타운들로 세분되었다. 당시를 넘어서 이름은 브뢰컬런에서 브로클랜드, 브로클린, 브루클라인으로, 그리고 결국적으로 브루클린으로 전개되었다. 킹스 군은 원래 12개의 군들 중의 하나였고, 브루클린은 킹스 군 안에서 원래 6개의 타운들 중의 하나였다. 군은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2세의 영예에 이름이 지어졌다.[위키백과]

엘리스섬은 오늘날에는 최초의 연방 이민국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엘리스 아일랜드는 뉴욕 항, 자유의 여신상이 지켜보는 시선 아래 위치하고 있다. 흔히 신세계로 통하는 관문이라 비유되는 이 섬은, 처음에는 겨우 1.2헥타르 남짓한 넓이였으나 대규모 토지 개간 사업을 통해 거의 11헥타르에 달할 정도로 넓어졌다.

엘리스 섬이 연방 이민국으로 문을 열기 전, 1855년부터 1890년까지 뉴욕 시에 들어오는 이민자들은 맨해튼에 있는 작은 캐슬 가든 이민국에서 수속을 밟았다. 그러나 캐슬 가든에서는 점점 늘어나는 이민자를 전부 처리할 수 없게 되었다. 연방 정부가 개입에 나섰고, 엘리스 아일랜드에 이민 수속 처리를 떠맡을 수 있는 건물이 들어섰다. 1892년 목조 건물에서 업무가 시작되었으나, 5년 후 화재로 건물들이 전소되었고 기록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미국 재무부는 불연성 자재를 사용해 완전히 재건축할 것을 명했고 1900년 새로운 본관이 문을 열었다. 의미심장한 사실은, 항해를 거쳐 도착한 1등석과 2등석 승객 대부분은 배 위에서 그저 간략한 검사만을 받고 곧바로 도시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성가신 존재로 전락하지 않을 만큼 재산이 충분할 거라는 가정 덕택이었다. 건강 진단과 법적인 조사를 받는 것은 주로 3등석 승객들이었다. 조사 과정은 세 시간에서 다섯 시간까지 걸렸으며, 그레이트 홀에서 진행되었다. 이 섬은 또한 구치소로도 사용되었다.

1924년 이후 이 섬의 이민국과 구치소는 간간이 사용될 뿐이었고, 1954년에는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1976년부터 엘리스 아일랜드는 대중에게 개방되었으며, 1984년 대규모 복원 사업이 시작되어 1990년에는 본관이 대중을 향해 새롭게 문을 열었다.[네이버]

엘리스 아일랜드
미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이 입국심사를 위해 대기하던 뉴욕시 앞바다에 있는 섬이다. 면적은 약 0.1km2 이고 맨해튼섬 남서쪽 1.6km 지점의 만내에 위치하며, 맨해튼섬과의 사이에는 연락선이 다닌다.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섬에서 북쪽으로 0.5km 거리에 있다. 이 섬에는 미국의 입국관리에 관한 시설들과 이민국의 각종 설비가 있다.[네이버]

엘리스섬(Ellis Island)은 허드슨 강 하구에 있는 섬이다. 1892년 1월 1일부터 1954년 11월 12일까지 미국으로 들어가려는 이민자들이 입국 심사를 받던 곳으로 유명하다.
뉴욕 항구에 자리잡고 있고,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섬에서 북쪽으로 0.8 킬로미터 약간 떨어져 있다. 이 섬의 이름은 1700년대 후반 동안에 이곳을 소유했던 상인이자 농부였던 사무엘 엘리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1808년에 미국 정부가 이 섬을 사들였다.

1892년에 정부가 엘리스섬을 이민 장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약 35척의 건물들이 건설되었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2층짜리 목재 건물을 차지했다. 1897년에 그 건물이 불타버리고 3층짜리 벽돌 건물로 재건되었다. 이민자들은 공부원들로부터 입국 의문을 받고, 의사들로부터 심사를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입국의 연방법에 의하여 금지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병을 옮게 하는 사람들이나 범죄자, 정신병자 등을 포함되었다. 그러나 엘리스섬에 정착한 이민들 중의 98%는 입국이 허가되었다.

이민 장소로 사용되었던 섬의 큰 규모는 1924년에 끝났고, 1954년에 정식으로 폐쇄하였다. 1965년에 섬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연방 정부의 국립 공원 서비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국립 공원 서비스는 1980년대에 섬의 건물들을 대량 개축하기 시작하였다. 섬이 1990년에 개장하면서 주요 건물은 지금 엘리스섬 이민 박물관이 되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품들은 낡은 사진들, 옷, 장난감, 이민자들의 여권들이 포함되어있다. 방문객들은 녹음되어 있는 이민자들의 엘리스섬 정착을 회상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등록방과 그레이트 홀(주요 접수 지역)은 지금와서 섬이 이민 장소로서 가장 바빴던 세월인 1918년과 1924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알아볼 수 있다.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섬과 함께 뉴저지주 관할수역 속에 있는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의 섬이다.[위키백과]

엘리스 섬

Ellice Island
엘리즈섬은 미국 어퍼뉴욕 만에 있는 섬이다. 면적이 약 11㏊인 이 섬은 뉴욕시 맨해튼 섬에 있는 배터리 공원의 남서쪽에 있다.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에게는 오이스터 섬으로 알려져 있었고, 1770년대에 이 섬의 소유주였던 새뮤얼 엘리스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기 전에는 버킹 또는 기벳 섬으로 불렸다. 한동안 선박의 바닥짐이 이곳에서 하역되었다. 1808년 뉴욕 주가 1만 달러를 받고 연방정부에 양도한 뒤, 요새와 화약고로 이용되었다. 1892~1943년 미국의 주요 이민 정류지였으며, 1954년까지 외국인과 추방선고를 받은 사람을 수용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1965년에 자유의 여신상 국립기념지에 포함되었으며, 1976년에 관광객들에게 재개방되었다.[다음백과]

리버티섬은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섬으로 반대편의 빌딩 숲은 뉴욕시의 맨해튼이다. 뉴욕주(州)의 어퍼뉴욕만(灣)에 있으며 맨해튼섬에서 남쪽으로 2.4㎞ 떨어진 지점에 있다. 크기는 작으나, 미국과 뉴욕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곳이다. 섬이름은 1956년 베들로스섬(Bedloe’s I.)을 개칭한 것이다.

뉴욕항에서 가장 오래된 검역소가 있었으며, 1937년까지 포트우드(Fort Wood)의 요새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46.5m이다. 1924년에 포트우드지역을 제외한 곳이 '자유의 여신상 국립유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37년에 나머지 지역이 추가로 지정되었다.

섬은 국립공원부에 의해 관리되며 뉴욕주가 섬 전체에 대한 공식 관할권을 갖고 있다. 뉴욕과 뉴저지주에서 배로 연결되며 북쪽으로 0.5km 거리에 엘리스섬이 있다.[두산백과]

브루클린 다리
브루클린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