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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북미(77)미국,뉴욕,브루클린다리(Brooklyn Bridge)(2019.8.10)

여행복사꽃 2023. 9. 13. 22:46

브루클린 다리(Brooklyn Bridge)는 브루클린에서 뉴욕 시의 맨해튼 내륙까지 잇는 현수교이다.
19세기 토목공사의 훌륭한 성과품인 브루클린 다리는 최초로 강철 케이블을 사용한 교량이다. 그것을 시공하는 동안 처음으로 공기 잠함(潛函)의 내부에서 폭약이 사용되었다. 존 오거스터스 뢰블링의 걸작인 브루클린 다리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으면서 건설되었다.

뢰블링은 공사 초기에 사고로 죽었고, 감독기술자로 자리를 인계받은 그의 아들 워싱턴 뢰블링은 뉴욕에서 교각의 기초공사를 하던 도중 공기색전증으로 불구가 되었다(1872). 그러나 컬럼비아 하이트(브루클린)에 있는 아파트에서 쌍안경으로 관찰하며 공사를 계속 감독했고, 그의 아내 에밀리 와렌 뢰블링을 그곳에 보내 지시했다.

압축공기의 폭발로 공기 잠함이 파괴된 데다 다른 잠함에서 수주일 동안 연기가 난 극심한 화재가 발생하여 공사는 늦어졌다. 또한 맨해튼 쪽에 있는 고정장치가 끊어지는 바람에 케이블이 강에 빠져버리고, 강선계약업자들의 사기로 수t의 케이블을 교체해야 되었기 때문에 공사가 더욱 지연되었다. 486m의 브루클린 다리의 주경간은 1890년 캔틸레버식 퍼스 오브 포스 다리의 완공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긴 것이었다. 4개의 케이블에 의해 지지되는 교량 도로면으로 차량과 사람이 다닐 수 있다.

뚜렷한 특징은 도로 위의 넓은 보행로인데, 이것에 대해 존 뢰블링은 "밀집된 상업도시에서 그것은 무한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다음백과]

브루클린 교(Brooklyn Bridge)는 미국 뉴욕주 뉴욕에 있는 현수교이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수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883년에 완공되어 이스트 강을 사이에 두고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다.
원래 뉴욕 브루클린 교(New York and Brooklyn Bridge)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가 1867년 1월 25일에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에 브루클린 교로 글자 수를 줄이자는 이야기가 전달되어[1] 1915년에 시청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위키백과]

브루클린브리지는 뉴욕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교량으로, 최초로 스틸 와이어를 사용한 현수교이다.
하프의 현처럼 가지런하게 늘어선 와이어와 네오고딕 양식의 석탑이 아름답다.
다리의 개요
브루클린브리지는 뉴욕 맨해튼섬과 브루클린 지구를 연결하기 위해서 이스트(East) 강 위에 세워진 교량으로 뉴욕의 상징과 같은 존재다. 네오고딕 양식의 석탑과 하프의 현처럼 가지런하게 늘어선 와이어가 특징이다. 이 교량은 또한 스틸 와이어를 사용한 세계 최초의 현수교이기도 하다.

1869년에 착공해 1883년 개통한 브루클린브리지는 공사 기간만 15년이 걸렸다. 그동안 600명의 인부가 투입되었는데 건설 과정에서 설계자인 존 로블링(John A. Roebling)을 비롯한 20명이 넘는 사람이 사고로 죽음을 당해 비운의 교량으로 불리기도 한다.

브루클린브리지의 뚜렷한 특징은 도로 위의 넓은 보행로인데, 이에 대해 로블링은 ‘밀집된 상업 도시에서 그것은 무한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교량의 가운데에는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아치 교각이 2개 세워져 있는데 이 덕분에 교량이 더욱 빛을 발한다. 아름다운 교량의 모습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네이버

2.다리의 건설 배경
브루클린은 특별한 인종 그룹과 문화가 두드러지는 다민족 거주지이다. 브루클린 지역의 첫 거주자들은 인디언들이었으나 1600년대에는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도시가 형성되었다. 1834년 도시화된 브루클린은 이탈리아인, 유태인, 동유럽 이민자들, 푸에르토리코인 등의 유입으로 뉴욕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거주지로 발달되었다. 브루클린은 대서양에 접해 있어 뉴욕의 중요한 항구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브루클린 해안에 자리 잡은 공장들의 발달로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브루클린과 이스트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맨해튼은 1825년 이리 운하의 개통과 함께 급속하게 발전했는데, 인접한 브루클린의 인구와 물자는 배를 이용해 미국의 상업, 금융, 문화의 중심지인 맨해튼섬으로 드나들었다.

1866년, 맨해튼과 브루클린에 밀려들던 많은 이들을 위해 이스트강에 두 도시를 연결하는 교량을 건설하자는 결정이 처음으로 내려졌다. 교량의 설계는 여러 개의 목교와 현수교식 수도교를 성공적으로 건설한 경력이 있는 독일계 이주민 존 로블링이 맡게 되었다.네이버

.다리의 역사
1) 다리의 건설
1867년 2월, 뉴욕 주 상원은 브루클린과 맨해튼을 잇는 현수교 건설을 허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두 달 뒤, 뉴욕과 브루클린의 교량 회사는 통합되었고 그 회사가 교량의 건설을 맡게 되었다. 교량 프로젝트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던 설계자 존 로블링은 페리를 타고 가다가 페리와 선착장 사이에 다리가 끼어 부상을 입었다. 그는 다리를 절단한 후 파상풍으로 고생하다가 공사가 착공되기 직전인 1869년 사망했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워싱턴 로블링(Washington Roeblig)이 32세의 나이에 공사를 이어받았다.

브루클린브리지는 1869년에 착공되어 교각인 2개의 타워를 세우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교각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테니스 코트 4개를 합친 크기로 무게가 3,000t에 달하는 케이슨(Caisson)이 강바닥에 내려졌다. 케이슨 공법은 교량 교각이나 터널을 만들 때 사용하는 상자 모양의 구조물인 케이슨에 고압 공기를 주입해 외부의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뒤 인부들이 그 안에서 강바닥의 암석을 깨면서 케이슨을 가라앉혀 단단히 고정하고 케이슨 위로 교각을 세우는 공법이다.

그러나 고압 상태에서 작업한 인부들이 밖으로 나오면 체내 조직 속에 녹아들었던 공기 중의 질소 성분이 기포화되면서 케이슨병(잠수병)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3명이 죽고 15명이 장애를 갖게 되었다. 총 감독인 워싱턴 로블링도 1872년 여름 케이슨병에 걸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로블링은 공사 현장이 보이는 아파트 침실에서 망원경으로 공사의 진척을 살펴보면서 아내 에밀리 워렌 로블링(Emily Warren Roebling)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어려운 수학과, 대차 곡선 계산, 재료의 강도, 교량의 사양 및 케이블 설치의 복잡함을 이해했고, 11년간 교량 건설의 관리를 도왔다.네이버

2) 다리의 개통
브루클린브리지는 공사를 시작한 지 14년이 지난 1883년 5월 24일 완공되었다. 교량 건설에는 1,550만 달러(현재 가치로 약 4억 333만 9,000달러)가 들었으며, 공사 중 약 27명이 사망했다. 개통식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많은 배들이 참석했다. 채스터 아서(Chester A. Arthur) 대통령과 프랭클린 에드슨(Franklin Edson) 시장이 축하용 대포를 위해 다리를 건넜고 브루클린 측 타워에 도착했을 때 시장 세스 로우(Seth Low)가 그들을 환영했다.

워싱턴 로블링은 행사에 참석할 수는 없었지만 당일 그의 집에서 기념 연회를 열었다. 그 외의 행사로는 밴드 공연, 선박의 총격전, 불꽃놀이가 있었다. 개통 첫 날, 총 1,800대의 차량과 15만여 명의 사람들이 교량을 이용했으며 교량을 건넌 첫 번째 사람은 에밀리 워렌 로블링이었다.

브루클린브리지의 주경간은 478m, 총 길이는 1,053m로 개통 후 몇 년간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다. 기존의 것들보다 50%는 더 길었다. 1980년대부터는 밤에 야간 조명으로 건축적 요소를 더욱 강조했다. 네오고딕 양식으로 석탑을 통과하는 통로 위의 뾰족한 아치가 특징이다. 교량의 페인트 색은 ‘브루클린브리지 황갈색(Brooklyn Bridge Tan)’과 ‘은색’이었다.

브루클린브리지는 4개의 주케이블에 의해 지탱되는 교량으로, 자동차 도로 못지않은 넓은 보행로가 특징이다. 다리 중앙의 넓은 보행로는 최초 설계자 존 로블링이 직접 넣은 것인데. 그는 교량의 시공 과정조차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브루클린브리지를 구상하면서 “밀집된 상업도시에서 그것은 무한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라며 미래를 예측했다. 현재도 그 보행로는 관광객과 다리를 지나는 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며 그의 예측이 정확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보행자들을 배려한 센스가 보여 존 로블링은 후대 사람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네이버

3) 다리의 보수
2007년 미니애폴리스 I-35W 고속 도로가 붕괴된 이후 대중들은 미국 전역의 교량 상태에 주목했다. AP 통신이 연방 정부의 전국 교량 점검 현황 보고서를 자체 분석한 결과 전국 60만7,380곳의 교량 중 무려 10.8%인 6만 5,605곳에서 구조적인 결함이나 심각한 균열 등이 발견됐다. 7,795곳은 구조적 결함이나 심각한 균열 모두가 보고됐는데 뉴욕 주에서도 400곳이나 포함됐다. 브루클린브리지도 이 경우에 해당했다.

브루클린브리지의 접근 통로를 개선하기 위해 2010년에 5억 8,000만 달러를 들이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계획대로라면 2014년까지 마칠 예정이었으나 늦춰져 2015년 4월까지 계속됐다. 보수 작업에는 새로운 조립식 경사로를 다시 설치함으로써 1차선에서 2차선으로 진입로를 넓히는 것, 요크가의 동쪽으로 향하는 278번 주간 고속 도로의 통과 증가, 2층 브루클린-퀸스 고속 도로의 지진 개조, 녹슨 레일과 안전벽 교체, 도로 갑판 재포장 등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4년 동안 우회할 필요가 있었다.

교량 갑판의 보수 공사가 끝난 2016년 8월, 뉴욕 교통부는 자전거 도로와 보행로를 확장하고, 교량이 이를 지지하도록 하는 데에 7달이 소요되고 37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브루클린 측 보행자 출입로에 대한 공사는 2017년에 진행되었다. 2018년 6월, 랜드마크 보존위원회는 브루클린브리지의 주탑 개조를 승인했으며 2018년 12월, 연방 정부가 시에 2,500만 달러를 기부했고, 교량의 접근로와 주탑 보수 공사에는 3억 3,700만 달러가 지불될 예정이다.

4.다리의 설계 및 기술
브루클린브리지는 건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먼저 브루클린브리지는 19세기 최고의 토목 공사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중요한 교량으로, 최초로 강철 케이블을 사용한 현수교이다. 전체 교량의 길이는 1,053m이며, 두 탑 사이의 간격은 478m로 이 교량이 지어졌던 1883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길었다.

교량이 지어졌을 때 엔지니어들은 교량의 공기 역학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었다. 1940년 타코마 해협 현수교가 공명 현상으로 붕괴된 후인 1950년대까지 교량은 풍동 터널에서 테스트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개방형 트러스 구조가 갑판을 지지하는 브루클린브리지의 구조는 공기의 영향을 덜 받는 구조였다. 더욱이 로블링은 교량과 트러스 구조를 요구 강도보다 6배 강하게 설계했다. 그 덕분에 다른 많은 교량들이 사라지거나 교체되는 현재까지 잘 버티고 있다.네이버

다리의 상징 및 의미
1) 다리 관련 시설 및 행사
다리의 타워 교각에는 건설 도중 사고로 숨진 설계자 존 로블링과 워싱턴 로블링 외 다른 20명의 노동자들과 중국인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참고로 사망한 총 22명의 노동자들 중 17명이 미국인 노동자들이고, 5명이 중국인 노동자들이다. 이들의 시신은 모두 뉴욕 국립묘지에 매장되었다.

브루클린브리지는 뉴욕을 방문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꼭 걸어서 건너가는 교량으로 유명하다. 브루클린브리지에서 바라보는 맨해튼의 전경이 아름답기 때문. 특히 석양 무렵 이 교량에서 바라보는 마천루의 실루엣은 뉴욕 관광의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교량에서는 매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진다.네이버

2) 다리의 예술적인 가치
브루클린브리지를 건너면서 보는 맨해튼의 모습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최근 뉴욕 건너편 브루클린이 여행하기 좋은 곳으로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미국 이민의 애환을 다룬 저우룬파 주연의 홍콩 영화 <가을날의 동화(An Autumn’s Tale)>에서도 브루클린브리지가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 윌리엄 볼컴(William Bolcom)의 오페라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A View from Bridge)> 역시 브루클린브리지가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었다.

2007년 영화 <나는 전설이다(I am Legend)>는 브루클린브리지에서의 한 장면을 찍기 위해 5억 달러를 소모했다. 또한 유명한 보드카인 ‘앱솔루트’의 광고에도 이 교량이 등장했다. 영화와 같은 콘텐츠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지역의 이름을 친숙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맨해튼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졌던 브루클린이 세계적인 인기 명소로 떠올랐다.

미국의 모더니즘 시인 하트 크레인(Hart Crane)은 브루클린브리지를 그의 두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집인 <The Bridge>의 조직 구조로 사용했다. 이 책은 여덟 부분을 아우르는 긴 시의 형태를 취하며, 오드(Proem: To Brooklyn Bridge)로 시작해 미국의 통일을 상징하는 다리의 변형된 시각으로 끝난다.

크레인은 워싱턴 로블링이 살았던,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 잠시 살았다. 미국 극작가 마크 비올리(Mark Violi)는 드라마 <로블링: 브루클린브리지의 이야기(Roebling: The Story of the Brooklyn Bridge)>를 썼다. 이 연극은 로블링 가족이 브루클린브리지를 건설하기 위해 애쓰는 극적인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연극의 태그 라인에는 “브루클린브리지를 건설한 남자들과 그것을 끝낸 여자에 관한 드라마”라고 쓰여 있다.

그 외에도 1984년 개봉한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9년의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뜨거운 오후(Dog Day Afternoon)>에서도 브루클린브리지가 등장한다.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