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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8콜로세움,판테온,이탈리아(1)

여행복사꽃 2023. 1. 3. 19:36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판테온,트레비분수,스페인계단,베네치아 광장,바티칸박물관,성 베드로 성당,시스티나 예배당,숙박 COLAIACO FIUGGI

▼콜로세움 Colosseum

검투사들의 대결과 호화로운 구경거리가 펼쳐지던 거대한 로마의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라고 한다. 플라비우스 왕조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본래는 비공식 이름이었던 콜로세움(Colosseum)의 유래에 대해서는 원형 경기장 근처에 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청동상(Colossus Neronis)과 명칭이 혼동되었다는 설과 '거대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콜로살레(Colossale)와 어원이 같다는 설이 있는데 중세에는 그 자체가 ‘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로마의 콜로세움은 70년경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80년에 건축이 끝나 100일 축제 기간 동안 그의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개막식을 올렸다. 온천 침전물 대리석으로 건축된 이 커다란 원형 건물은 처음에는 플라비아누스 원형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이곳에서 열리는 검투사 경기를 보러 찾아드는 5만 명 가량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경기장은 또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거나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되었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대결이 끝나면 승자는 패배한 검투사를 죽여야 할지, 혹은 용맹함을 보여 주었으니 살려야 할지에 대한 관중들의 결정–혹은, 황제가 그 자리에 있다면 황제의 결정–을 살폈다. 오늘날 매우 유명한, 엄지손가락을 올리거나 내리는 제스처를 통해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다. 시합에 들어가는 동물들(사자, 표범, 악어 등)은 극장 아래에 있는 우리에 가두었다가, 로프로 끌어올리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경기장에 풀려났다.

중세에 콜로세움은 교회로 쓰였으며, 그 후에는 저명한 두 로마 가문인 프란지파네 가문과 안니발디 가문에 의해 요새로 이용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이 건물은 손상을 입어 지진의 피해를 입거나 강도가 돌을 약탈해 가고,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생긴 현대의 공해에 시달리게 되었으나, 콜로세움은 여전히 잔혹한 여흥을 즐기는 인간의 취향을 반영하는 기념물로 남아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Arco di Constantino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의 라이벌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기념으로 세운 개선문.


콜로세움 서쪽에 서 있는 이 문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서기 312년 밀비안(Milvian) 다리 전투에서 그의 라이벌이었던 막센티우스를 물리친 기념으로 세운 개선문이다. 높이는 21m에 달하며 벽면의 부조는 황제의 업적과 전쟁 장면 등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전쟁에서 이긴 장군들은 반드시 이 문을 통과해 황제에게 승전을 보고했다고 한다. 로마에 있는 개선문 중 가장 크며 파리의 개선문도 이것을개선문의 할아버지격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본떠 지어진 것이다.[네이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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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테온 Pantheon

▲모든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며, 웅장하고 여전히 제 모습을 간직한 돔으로 유명한 곳

로톤다 광장에 있는 판테온은 로마 건축 기술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여겨지는 돔으로 유명하다. 습지의 지반에 세워졌지만 2천 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특히 대단하다. 판테온 안에는 화강암과 노란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 깔리고 반구형 돔이 있는 커다란 원형 방이 있다. 이 원형 홀에서 43.3m 높이의 돔 꼭대기까지는 반구의 지름과 정확히 일치하며 완벽한 반구형을 이룬다. 돔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눈'(오쿨루스)이라는 이름의 둥근 천창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온다.

판테온은 120년경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예전에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기원전 27년에 지었던 신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아그리파의 건물은 화재로 80년에 파괴되었으나, 하드리아누스가 지은 우아한 건물의 현관 위편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건물은 당시로써는 혁신적이었으며, 그리스의 사원을 연상시킨다. '판테온'이란 '모든 신들의 신전'이라는 의미이며, 원래 고대 로마인들이 숭배했던 행성의 신에게 바치는 건물이었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 포카스가 609년 교황 보니파시오 4세에게 선사한 이후, 판테온은 기독교 교회인 '산타 마리아 아드 마르티레스'가 되었다. 포카스의 선물임을 기념하여 '로마 포럼'에는 기둥이 세워졌다.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건물은 약탈당하고 수난당했으며,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가 663년 금박이 입혀진 청동 지붕 타일을 약탈해 갔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교황 요새의 방어 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를 실행하면서 포티코에 있는 청동 천정 대들보들을 떼어가 산탄젤로 성의 대포를 만들었다. 이 건물은 무덤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두 명의 이탈리아 왕과 라파엘로를 비롯한 르네상스 화가와 건축가들이 잠들어 있다.[네이버지식백과]

▲118∼128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건축되었으며 다신교였던 로마의 모든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이다.

판테온이라는 명칭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판(Pan)과 신을 뜻하는 테온(Theon)이 합쳐져 만들어 졌다. 아그리파 집정관에 의해 처음 건축된 판테온은 로마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고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로마를 재건하기 위한 계획으로 다시 건축되었다. 당시 판테온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하게 전하는 바 없으며 현재는 신전으로만 알려져 있다. 아그리파 집정관 때 처음 만들어진 건축의 흔적으로는 석판이 남아있는 것으로 전한다.

원형 본당(本堂)의 안지름과 천장의 높이 43.2m, 벽의 두께 6.2m. 북측 입구에 코린트식 8주 전주식(前柱式)의 돌출랑(突出廊)이 있으며, 기둥 높이는 12.5m이다. 당 내부에는 7개의 벽감(壁龕:神像을 안치한 작은 방)이 설치되어, 제우스·아폴론·아르테미스·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 등 다신교였던 로마에서 중요 신들이 모셔졌다. 돔의 내측은 원개 천창(天窓) 부분을 제외하고는 28열의 방사상 격간(格間)으로 덮여 있고, 각각의 격간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채광은 돔 정상에 설치된 지름 9m의 천창뿐이며, 벽면에는 창문이 없고, 거대한 본당의 외형에는 전혀 장식이 없다. 그 수적 비례의 미와 강대한 내부 공감의 창조라는 당시의 경이적인 토목기술로서 서양건축사상 불후의 명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브루넬레스키가 판테온의 돔 건축 방식을 채용해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건축하였고 이로인해 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인정받았다.

▲609년 판테온은 교황 보나파시오 4세에 의해 가톨릭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ad Martyres)으로 개축되어 사용되었는데 중세를 거치면서 건축물이 훼손되는 것을 그나마 막을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판테온은 무덤으로 사용되었는데 이탈리아의 거장 화가였던 라파엘로와 카라치가 묻혀져 있고 이탈리아의 왕 빅토리오 임마누엘레 2세, 움베르토 1세도 판테온에 묻혀져 있다. 현재의 판테온은 가톨릭 성당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미사가 집전되거나 가톨릭 종교 행사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판테온이라는 명칭은 오늘날 국가적 영예가 있는 자에게 바쳐지는 건물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네이버지식백과]

▼로톤다 광장
Piazza della Rotonda


Obelisco Macuteo

마쿠테오 오벨리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