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8.12 오후 스위스 중부에 위치한 루체른 이동 [코모 - 루체른 : 약 3시간 소요]
-프랑스혁명 당시 루이16세 왕가를 수호하다가 전멸한 스위스용병을 기념하기 위해 새긴 사암절벽에 새긴 조각상인 빈사의 사자상 관광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나무다리로 길이가 200m에 이르는 카펠교
-인터라켄 이동 [루체른 - 인터라켄 : 약 1시간 소요]
-석식 및 호텔투숙 숙박 BAREN
▼빈사의 사자상(瀕死의 獅子像, 독일어: Löwendenkmal 뢰벤뎅크말
빈사의 사자상(瀕死의 獅子像, 독일어: Löwendenkmal 뢰벤뎅크말[*])은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조각상이다. 덴마크의 조각가인 베르텔 토르발센이 설계하고 루카스 아호른이 조각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1792년 8월 10일 사건 때 튈르리 궁전을 사수하다 전멸한 라이슬로이퍼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 미국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은 이 조각상을 "세계에서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극찬하였다.[위키백과]
▲17세기 초반부터 스위스 근위병 연대가 프랑스 왕실의 일부로 자리를 잡았다. 1789년 10월 6일, 루이 16세는 가족들과 함께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의 튈르리 궁전으로 이사해야 했다. 1791년 6월 루이는 왕당파 장교들이 지휘하는 군대가 밀집한 국경 근처의 몽메디로 도망치려 했다. 1792년 8월 10일 시민혁명군이 궁전을 습격했다. 왕실 가족들이 입법의회로 피신하기 위해 튈르리에서 호위를 받자, 자연스럽게 전투가 발발했다. 스위스 근위대는 탄약이 부족했고 수적으로 열세였다. 총격전이 시작된 지 30분 후에 국왕은 스위스 근위병에게 퇴각하고 병영으로 돌아가라는 서신을 남겼다.[2] 전투 중간에 이 서신이 전달되었지만, 근위병들이 이미 더 이상 방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이후였다.
튈르리를 지키던 스위스 근위대 760명이 전투 중에 죽거나[4] 항복한 후 학살당했다.[5] 약 200명의 사람들이 감옥에서 부상당한 채 죽거나 9월 학살로 사망했다. 튈르리에서 탈출한 약 100명의 스위스인을 제외하고, 연대의 유일한 생존자는 국왕의 허가를 받아 8월 10일 며칠 전에 노르망디로 곡물 수송대를 호위하기 위해 파견된 300명의 강력한 분견대였다.[7] 비록 튈르리의 지휘관 카를 요제프 폰 바흐만 소령이 붉은 근위대 제복을 입은 채 9월에 정식으로 재판을 받고 단두대에 서게 되었지만, 생존한 두 명의 스위스 장교는 나폴레옹 휘하에서 고위 장교가 되었다.
반란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근위대와 해체된 스위스 전선군 병사들 중 약 350명은 이후 프랑스 제1공화국 혁명군에 입대했고, 다른 이들은 방데 전쟁에서 반혁명군에 합류했다. 1817년 스위스 연방 의회는 생존자 중 389명에게 충성과 명예(Treue und Ehre) 훈장을 수여했다.[위키백과]
♣기념비 건립은 전투 당시 루체른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근위대 장교 카를 파이퍼 폰 알티쇼펜이 주도했다. 그는 1818년에 모금을 시작했으며, 이 기념비 설립은 유럽 왕실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4] 이 사자상은 덴마크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이 설계했고 1820년부터 1821년까지 루체른 근처의 사암 채석장에서 석공 루카스 아호른(Lukas Ahorn)이 조각했다. 조각을 만들 당시 일부에서는 외국 군주를 위해 죽어간 스위스 시민들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불쾌해 했고, 스위스 자유주의자들은 이에 항의하기 위해 사자발 중 하나를 잘라내려고 계획하기도 했다.[위키백과]
♣“ 사자가 낮은 절벽의 수직면 소굴에 누워있다. 사자가 절벽의 살아있는 바위로 조각되었기 때문이다. 몸집도 크고 태도도 고상하다. 사자는 고개를 숙였고, 부러진 창이 어깨에 꽂혀 있다. 사자가 지키는 발은 프랑스의 백합 위에 놓여있다. 덩굴이 낭떠러지를 타고 내려와 바람에 흔들리는데 위에서 맑은 시냇물이 흘러 밑동 연못으로 흘러들고, 연못의 매끄러운 수면에는 백합꽃 사이로 사자가 비친다.
주변에는 푸른 나무와 풀이 있다. 그곳은 소음과 동요와 혼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보호되고, 조용한 삼림 구릉지이다. 이 모든 것이 적합하여 사자는 그런 곳에서 죽으려 하지, 화려한 철제 난간으로 둘러싸인 공공 광장의 화강암 받침대 위에서는 죽지 않기 때문이다. 루체른의 사자는 어디에서도 인상적일 수 있지만, 그가 있는 곳만큼 인상적인 곳은 없다.”
— 마크 트웨인 〈방랑기〉(A Tramp Abroad, 1880 [위키백과]
▲카펠교(독일어: Kapellbrücke, 문자 그대로 예배당 다리)는 스위스 중부의 루체른에 있는 로이스강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지붕이 덮인 나무 인도교이다. 근처 성 베드로 예배당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다리[1]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많은 내부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러나 1993년에 일어난 화재로 많은 부분이 수백 년 된 다리 대부분과 함께 파괴되었다. 화재 이후 복원된 카펠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지붕 다리이며[2][3],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트러스교이다.[4] 카펠교는 도시의 상징이자, 스위스의 주요 관광명소 중 하나이다.[위키백과]
▼루체른역(독일어: Bahnhof Luzern)
▲루체른역(독일어: Bahnhof Luzern)은 루체른주의 루체른시에 있는 스위스 철도망의 주요 허브이다. 여러 철도 노선의 국내 및 국제 교통을 제공하는 터미널역이며 루체른 호수 남쪽의 도심과 해안가 위치에 있다.[1][2]
최초의 역은 1856년 프랑스와 독일 철도와 연결된 올텐과 바젤에서 출발하는 스위스 중앙 철도 본선의 끝에서 루체른 호수 가장자리에 개업했다. 현재 필라투스 거리의 경로는 아직 미개발 상태였다. 터미널역은 호수의 여객선 서비스를 위한 부두와 루체른 시의 성문으로 직접 연결되었다. 그 결과 호숫가 지역은 철도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발전했다. 19세기에는 호수에 증기항법이 도입되고 여러 철도 노선이 건설되면서 빠르게 허브로 발전했다. 고트하르트 철도, 볼후젠을 경유하여 베른으로 가는 노선, 추크와 취리히로 가는 노선, 미터궤 브뤼닉 철도가 있다.
1896년에 새로운 역이 문을 열었고, 독특한 큐폴라 지붕을 가진 대규모 새 건물도 들어섰다. 원래 역에서 거의 90° 정도 선회하여 루체른 중심부로 가는 다리를 향해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새로운 접근 방식은 원래 노선과 달리 평평한 도로 건널목이 없고, 대신 제방이나 절단 도로를 달린다. 브뤼닉 철도도 새로운 역에 통합되었다. 1922년 올텐에서 출발하는 노선과 함께 전철화되었다. 1910년에 이르러 새로운 역의 수용인원이 한계에 다다랐고 확장 계획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은 철도 작업에 발을 묶었다.
1971년 2월 5일 아침 역무실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건물은 맹렬하게 불에 탔고, 한 시간 안에 큐폴라지붕이 붕괴되어 역 앞과 중앙홀이 파괴되었다.[3] 가건물 등으로 서비스를 복원해 운영을 재개할 수 있도록 했다. 1980년 스위스 연방철도, 스위스 포스트, 루체른 시, 주가 공동으로 역의 종합적인 재개발을 위한 건축 공모전을 시작했다. 이것은 또한 루체른에 대한 철도 접근법의 향후 발전을 고려하였다. 그러나 루체른 호수 아래에 터널이 있는 통과역은 제외되었다.
1991년 2월 5일에 새로운 역이 지어졌고, 이전 역이 파괴된 지 정확히 20년 만에 문을 열었다. 새 역은 암만과 바우만의 건축 회사에 의해 계획되었고, 당시 직원인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새 역의 중앙홀을 설계했다. 이곳은 "도심의 다양한 기능을 철도와 연결하는 다층, 넉넉한 크기의 공공 공간"이라고 한다. 승강장은 옛역보다 길고 지하상가도 훨씬 넓다.[3][4]
2012년 말, 크린스-마텐호프역과 루체른역 사이의 새로운 터널 노선이 브뤼닉선에 개통되었다. 터널은 덜 직접적인 표면 정렬을 대체하여 여러 혼잡한 평면 교차로를 제거하고 복선을 제공할 수 있지만, 브뤼닉선 열차가 사용하는 터미널 승강장은 변경되지 않았다.[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