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7)(오전)템스 강 Thames River 유람선, 런던 아이,런던 타워 브리지
(오후)대영박물관,런던 히드로공항→인천 향발 KE908 기내박(영국→인천)
▼대영박물관
(British Museum)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고고학 및 민속학의 수집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런던의 블룸스베리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이 박물관과 부설 도서관은 1753년 한스 슬론 경(1660~1753)이 소장하고 있던 예술품과 장서를 정부가 매입하면서 설립되었다. 의회법에 따라 설립된 이 박물관은 1759년 대중에 공개되었으며, 당시에는 몬터규 백작의 저택에 소장품들을 전시했다.
현재의 건물은 로버트 스머크 경에 의해 신고전양식으로 설계된 것으로 1823~52년 몬터규 백작 저택의 부지 위에 건설되었다. 이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고대 및 중세의 공예품과 예술품들이다. 민속학적 수집품들은 런던에 있는 인류박물관에 따로 전시되어 있다.
1973년 이 박물관의 도서관은 다른 몇몇 주요기관들의 장서를 합하여 영국도서관으로 창설되었다.[다음백과]
▼로제타 스톤
(Rosetta Stone)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기원전 196년에 만들어진 로제타 스톤은 이집트의 지중해의 작은 마을인 로제타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멤파스의 신관이 선포한 일상적인 법령을 세 가지 언어로 새긴 돌이며, 내용보다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해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돌이라고 할 수 있는 로제타 스톤은 1799년 나폴레옹 원정대가 나일 강 삼각주에서 발견한 후 영국으로 옮겨 왔다.[다음백과]
▲이집트 상형문자의 열쇠
The key to Egyptian hieroglyphs
로제타 스톤이 발견 되자마자 학자들은 신비한 이집트 상형 문자를 해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읽을 수 있는 그리스어 비문은 스톤의 각 대본이 동일한 법령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토마스 영(Thomas Young, 1773~1829)과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Jean- 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이라는 두 명의 뛰어난 인물이 상형문자를 연구하고 있었다. 이전의 학자들은 상형 문자 비문에서 반지 또는 카우치가 아마도 왕의 이름을 동봉했을 것이라고 이미 추측했다. Young은 Rosetta Stone의 cartouches를 사용하여 일부 상형 문자가 그리스 왕실 이름 프톨레마이오스의 소리를 썼다는 것을 알아 냈지만 대부분의 상형 문자는 상징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했습니다.[위의사진번역]
▲로제타 스톤의 역사
로제타 스톤은 1799년 7월 중순 나폴레옹의 라시드(로제타) 마을 침략군 병사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집트가 기독교가 된 후에, 이집트 사원은 닫히고 많은 것은 폭파되고 그들의 벽돌은 재사용되었다. 얼마 후, 로제타 스톤은 원래 위치에서 라시드로 옮겨져 15세기에 이집트의 통치자인 술탄 카이 베이에 의해 요새로 지어졌습니다. 1799년에 그것은 프랑스인들이 새로운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을 때 재발견되었다. 그것의 중요성은 즉시 인식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인이 패배했을 때, 그것은 1801년 알렉산드리아 조약의 일환으로 영국군에 항복했다. 1802년 대영박물관에 들어갔다. 이 사건들은 '1801년 영국군에 의해 이집트에서 체포되었다'와 '조지 3세에 의해 발표되었다'라는 측면의 페인트 라벨에 기록되었습니다. 로제타 스톤의 사본은 학자들에게 국제적으로 배포되었으며, 로제타 스톤이 발견된 지 25년 만에 상형 문자가 해독되었습니다. [위의사진번역]
▼라마수
(Colossal statue of a winged lion)
라마수(Lamassu)는 아시리아의 보호신으로서, 흔히 인간의 머리, 황소나 사자의 몸, 새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어떤 글에서는 여성의 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덜 자주 사용되는 이름은 세두(Shedu)인데, 라마수의 수컷을 가리킨다. 라마수는 황도대, 모성별, 별자리를 나타낸다.[위키백과]
라마수(Colossal statue of a winged lion)
대영박물관 6 전시실 : 중동 - 아시리아 조각과 발라와트 문
라마수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님부르 북서쪽 궁전에 있는 거대한 사자상이다. 이 사자상은 날개가 달려 있으며 인간의 머리를 하고 있다. 악령으로부터 문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2개의 수호상 중 하나인 이 유물은 다섯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정면에서 볼 땐 다리가 4개지만 측면에서 볼 땐 다리가 5개로 보인다.[위키백과]
▲코르사바드 사르곤 궁전
(Khorsabad The Palace of Sargon)
이 지역은 주로 아시리아 왕 사르곤 2세(721-705 BC)를 위해 지어진 코르사바드의 도시와 궁전의 조각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머리를 가진 날개 달린 황소 한 쌍은 원래 불운에 대항하는 마법의 수호자로서 성곽의 문 중 하나에 서 있었다.[위의사진 영어번역]
▼릴리의 비너스 (아프로디테)
(Lely's Venus (Aphrodite)
▲릴리의 비너스 (아프로디테)
Lely's Venus (Aphrodite)
여기서 여신 비너스는 목욕을 하면서 놀랍니다. 그녀의 물 항아리는 왼쪽 허벅지 밑에 놓여 있습니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 웅크리고 앉아 팔과 표현력 있는 손으로 몸을 가리려 합니다. 상투 모양의 헤어스타일을 한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는 아마도 침입자의 방향으로 신경질적으로 한쪽으로 돌려져 있습니다.
벌거 벗은 아프로디테는 그녀의 금성이라고 불리는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조각가들에게 인기있는 주제였습니다. 이 조각품은 아마 1세기 또는 2세기 광고에서 만들어졌으며 초기 그리스 원본의 로마 사본입니다. 잃어버린 원래의 조각품은 아마도 기원전 2세기에 지어진 청동 또는 대리석이었을 것입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많은 그리스 조각품들과 마찬가지로, 원래의 동상은 삽화와 관객 또는 이 경우 관음증 사이의 상호 작용을 만들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그 주위를 걸어 보면 네 가지 관점 각각이 벌거 벗은 여신의 현저하게 다른 측면을 제시하는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 감질나게도, 어느 것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만능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원래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웅크리고 있는 비너스의 이 특별한 사본이 틈새에 전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있습니다. 주각의 얇은면에는 단순한 몰딩이 앞부분 주위에서만 실행되며 그림의 모델링은 앞면과 옆면보다 뒤쪽에서 덜 개발됩니다.[위의시진번역]
▼초이설-구피에
아폴로 대리석 조각상
Choiseul-Gouffier Apollo
Marble statue
▲초이설-구피에
아폴로 대리석 조각상(Choiseul-Gouffier Apollo)은 이전에 Comte Marie-Gabriel-Florent-Auguste de Choiseul-Gouffier (1752 × 1817), Académie Française Academie 회원 및 Sublime Porte 프랑스 대사의 컬렉션에 있는 실물 크기 (1.82m 높이) 대리석 동상입니다. 1784년부터 군주제가 몰락 할 때까지 현재는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아마도 아폴로 신 또는 승리 운동 선수를 대표하는 벌거벗은 청년의 누드 조각은 기원전 460년에서 450년 사이의 스타일로 볼 때 기원전 1세기의 제국 로마 사본입니다. 이 조각품은 청동 원본에 개별적으로 부착된 머리카락 자물쇠 조각과 같이 대리석으로 번역된 청동 작품의 특징을 유지합니다. 동상의 오른쪽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 지지대와 왼쪽 팔을 다리에 부착하는 스트럿은 모두 대리석 버전의 보강재이며 청동 원본보다 깨지기 쉽습니다.[위키영어백과번여]
▼아폴로 아니면 선수?
기원전 약 470-460년의 그리스 원본 이후 로마, 1세기 AD
자랑스럽고 자신감있게 서 있는이 동상은 우승 권투 선수 또는 신 아폴로를 대표 할 수 있습니다. 가슴은 강력하게 근육질이며 어깨와 팔의 정맥은 두드러지며 복서에게 특히 적합한 체격입니다. 그는 마치 경기에서 승리한 것처럼 표현됩니다. 승리자의 리본 또는 권투 선수의 가죽 끈(주먹과 팔뚝을 묶어 장갑을 낀다)이 나무 줄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살아남은 이 동상의 많은 대리석 버전은 고대 세계에서 그 유형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보여 주며, 지금은 잃어버린 유명한 청동 원본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그 형상의 정체를 결코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폴로는 권투의 신이었고 그는 일반적으로 이 날짜에 긴 머리카락으로 표시되었지만 이렇게 땋는 것은 480-460년경 운동 선수들에게 인기있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이전 Choiseul Gouffier Collection CR 1818,08011 (조각 209)
▼파르테논 신전
(Parthenon)
▲BC 5세기에 세워졌으며 도리아식 오더가 최고로 발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파르테논이라는 이름은 이 신전과 관련이 있는 아테나 파르테노스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BC 447년 공사가 시작되었고 건물 자체는 BC 438년에 완성되었다. 흰 대리석으로 지은 직4각형의 파르테논 신전의 기본구조는 원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교 사원으로 바뀐 5세기까지는 본질적 원형을 유지했다.1458년 아테네를 점령한 투르크인들은 귀퉁이 첨탑 이외에는 변화 없이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남아 있던 조각품 대부분이 1816년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팔리고 나머지 다른 조각들은 루브르, 코펜하겐 박물관 등에 있으나 아직도 많은 수가 아테네에 있다.[다음백과]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상
THE SCULPTURES OF THE PARTHENON
▲아테네의 아크로 폴리스에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기원전 447 년에서 438 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조각가 인 페이디아스 (Pheidias)가 여신의 거대한 금과 상아상을 보관 한 도시의 수호 여신 인 아테나 (Athena)에게 헌정되었습니다. 이 사원은 신화와 컬트의 장면을 대표하는 조각품으로 풍성하게 장식되었습니다. 프리즈 (낮은 구호로 조각 됨)가 콜로 네이드 내부의 건물 네면을 돌아 다녔습니다. Metopes (높은 구호로 새겨진 직사각형 슬래브)는 사원 외부의 architrave 위에 배치되었고, 원형에 새겨진 pedimental 조각은 게이블을 채웠습니다.
양쪽 끝에 그것들은 기원전 438년에서 432년 사이에 생산되었습니다.[대영박물관사진캡쳐영어번역]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Parthenon)
▲18 전시실 : 고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Parthenon)
아테네의 상징으로 수호신 아테네에게 바쳐진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물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기원전 5세기경의 유물로, 19세기에 영국으로 가져왔으며 엘긴 대리석이라고 불리는 이 부조물들을 보면 고대 그리스 시대의 우수한 예술성을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반은 인간, 반은 동물인 켄타우로스와 라피스족이 싸우는 전투를 보여 주는 조각상은 무척 유명하며 달의 여신 셀린느의 이륜 전차를 이끄는 말의 두상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위키백과]
▼Cavalcade. 파르테논 신전 북쪽 프리즈의 XLI 블록, ca. 기원전 447~433년.
▲맨몸으로 말을 타는 기수들. 기원전 5 세기 메트로폴리스는 원래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 폴리스 (Acropolis of Athens)의 파르테논 신전 [구글검색번역]
▼엘긴 대리석 조각군
(Elgin Marbles) 혹은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Parthenon Marbles)
▲엘긴 대리석 조각군(Elgin Marbles), 혹은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Parthenon Marbles)은 고전 그리스의 대리석 조각들로, 원래 파르테논 신전이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건물에 있던 것들을 통째로 떼어온 것이다.
반출 과정 및 논란
1799년부터 1803년 사이 오스만 제국 주재 영국 대사였던 제7대 엘긴 백작 토머스 브루스는 오스만 제국의 모호한 허가만으로 아크로폴리스에서 대리석 조각들을 떼어낼 이권을 얻었다. 1801년에서 1812년까지 엘긴의 대리인들은 프로퓔라이아와 에렉테이온의 조각상과 건축 장식과 더불어 파르테논 신전의 현존하던 조각 중 거의 절반을 떼갔다.
이 대리석 조각들은 바다를 통해 영국으로 옮겨졌다. 영국에서 엘긴은 비판을 받았으며 문화 파괴(vandalism)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의회의 공개 토론과 엘긴에 대한 변호가 이어지면서 이 대리석 조각들은 1816년 영국 정부에 매각되어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었으며, 아직도 이곳 두빈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행위에 대해 적법성이 의심되고 있으며, 엘긴 대리석 조각군을 대영 박물관에 놔 두어야 할지 아니면 아테네에 반환해야 할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위키백과]
▲페디먼트 pediment
고대 그리스 신전의 박공. 페디먼트는 그리스 신전 건축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색인데, 일반적으로 조각을 하고 세 꼭지에는 장식적인 벽돌을 붙인 것이 전형적이다. 이러한 페디먼트의 대표적인 예는 파르테논 신전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페디먼트는 그후 고전건축의 전형적인 모티브가 되었다. 고전건축에서의 박공벽은 경사가 완만하며 일반적으로 코니스를 두르는데, 페디먼트는 창 또는 출입구의 윗부분 장식으로써 건축물의 내외에 사용되었다.[네이버지식백과]
▲엘긴 마블
1. 개요
영국의 토마스 엘긴이 반출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부조 조각. 이를 두고 약탈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반론도 존재한다.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이라고도 불린다
(2)상세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기, 1799년부터 1803년 사이 오스만 제국 주재 영국 대사였던 엘긴의 제 7대 백작 토머스 브루스(엘긴 백작)는 오스만 제국의 모호한 허가만으로 아크로폴리스에서 대리석 조각들을 떼어낼 이권을 얻었다. 1801년에서 1812년까지 엘긴의 대리인들은 프로퓔라이아와 에렉테이온의 조각상과 건축 장식과 더불어 파르테논 신전의 현존하던 대리석 조각 중 거의 절반을 뜯어내 영국으로 가져가 대영박물관에 전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단순히 위의 설명만 읽으면 엘긴이 영락없는 날강도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긴 했다. 당시 파르테논은 1687년에 오스만이 화약창고로 쓰다가 베네치아에게 공격받아 화약 유폭으로 지붕이 개발살났었고, 주변의 잔해들이나 조각상들은 사람들이 갈아다가 건물 재료로 쓰려고 하는 등 대접이 엉망이었다.[1] 게다가 엘긴은 파견되어 영국을 떠나기 전까지 정부의 고위층에게 "가서 예술 작품들 본뜨고 스케치 좀 하려는데 미술가 몇 명 데려갈 돈을 달라" 며 요청했으나 무시당했다. 결국 문화재가 무의미하게 갈려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엘긴은 사비 7만 파운드를 들여 오스만 쪽 인사들을 매수하고 상당량의 잔존 조각상들을 뜯어내 적자를 내면서까지 영국에다 팔아버렸다. 그런데 정작 거금을 들여서 영국에 갖고 왔더니 높으신 분들 반응은 영 시큰둥했다.
자기 딴에는 조국을 위한 일이었는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등의 사람들이 영국에 파는 것보다 더 높은 금액에 사겠다며 들이댔으나 무시했다. 그리고 나중에 통째로 조각물들을 뜯어간게 미안했는지 시계탑을 지어 주었지만 1884년에 불이 나서 건물이 부서졌다.
오스만 쪽은 묵인해줬기에 별 문제 없었으나,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게서 독립하고 나자 엘긴 마블 등 과거 영국이 약탈해간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조각의 환수를 요구하기도 했었지만, 영국측은 현재의 그리스 국가가 독립하기 전에 당시의 합법적인 주인인 오스만 측과 합의를 하고 사왔기 때문에 적법하다는 입장으로 거부하고 있다.[나무위키]
출처: 구글검색 사진캡쳐
▼람세스 2세
(Colossal bust of Ramesses II)
▲ 4 전시실 : 고대 이집트 - 이집트인의 조각
람세스 2세(Colossal bust of Ramesses II)
출애굽기 시대의 파라오로 알려진 제19 왕조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의 윗부분으로, 테베에 있는 람세스 2세의 기념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신의 부인 안크네스네페이브라의 석관
Sarcophagus of the God's wife Ank hnesneferibra, 제작년대 - 제26왕조인 아마시스왕 재위 기간(기원전 570~526년)
▼아문라의 숫스핑크스
Ram-Sphinx of Amun-Ra
▲아문라의 람스핑크스
Amun의 스핑크스는 숫양의 형태로 Nubian Pharoah Taharqa를 보호합니다. Nubian Pharoah Taharqa의 이미지는 그의 앞다리 사이에서 보호됩니다. 이 동상은 대영 박물관의 비슷한 조각과 함께 현대 수단의 카와 부지에서 유래했습니다.[구글검색번역]
▼이집트 왕의 석관
▼쇠똥구리 석상 안내문
▲이것은 풍뎅이 딱정벌레가 생존 할 수있는 가장 큰 표현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또한 파라오 신의 마지막 위대한 조각상들 중 하나이다. 풍뎅이는 새벽에 태양신이 가정 한 형태 인 Khepri를 나타냅니다. 이집트인들은 마치 자기 창조에 의한 것처럼 묻힌 똥덩어리에서 풍뎅이가 부화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태양신은 또한 새벽에 중생하기 전에 매일 밤 자신의 힘을 새롭게하면서 스스로 창조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각 일출은 창조주 신 Atum으로 시간의 새벽에 신의 첫번째 외관의 반복이었다.
동상은 석영 diorite, 일반적으로 이집트 조각에 사용되지 않는 돌로 만들어집니다. 동부 사막 깊은 곳에 있는 세 개의 고대 채석장이 확인되었다. 그들의 착취는 로마 페리오에 대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지만, 이 작품의 주제와 솜씨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조금 더 일찍 만들어졌음을 암시한다.
풍뎅이는 원래 Heliopolis의 Atum 사원에 세워 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로마 시대에는 아마도 처음에는 알렉산드리아로, 나중에는 콘스탄티노플(현대 이스탄불)로 옮겨졌을 것이다. 기원전 3세기 또는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이스탄불에서; 아마 원래 Heliopolis에서, Atum의 사원
석영섬록암, EA74
▼거대한 쇠똥구리의 석상
sculpture géante d'un scarabée
▲고대 이집트에서는 쇠똥구리의 습 성을 신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포유동물의 배설물로 공 모양을 만들어 그것을 굴리는 쇠똥구리의 모습을 보면서 공은 태양을 쇠똥구리는 태양의 운행을 상징하는 신인 태양신 케프리와 동일시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풍뎅이는 태양 재생과 부활의 상징 으로 숭배되었습니다.[구글검색번역]
▼상이집트 출토 석회암 암컷 스핑크스
Limestone female sphinx from Upper Egypt
▲어퍼 이집트 대영 박물관의 석회암 여성 스핑크스,로마시대,서기2세기
그리스 신화에서 스핑크스는 여자의 머리, 새의 날개, 사자의 몸, 종종 뱀의 꼬리를 가진 날개달린 사자로 남성을 잡아먹는 괴물이었습니다.
대조적으로 파라오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왕권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그리스 스핑크스는 이집트에 거주하는 그리스인의 무덤을 지켰을 것입니다.[구글검색]
▼사슴 모자이크, 카르타고
Deer Mosaic, Carthage
▲오사마 슈키르 무하메드 아민
Osama Shukir Muhammed Amin [구글검색]
화려한 분수에서 물을 마시는 길들인 사슴; 이 장면은 초기 기독교 예술에서 생명의 샘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현대의 튀니지인 카르타고에서 . 서기 4~5세기. (런던 대영 박물관)
▼네바문 무덤 벽화 '늪지의 새사냥'
Fowling in the marshes', fragment of wall painting from the tomb of Nebamun
▲영어에서 번역됨-네바문의 잃어버린 무덤은 이집트 테베의 나일강 서쪽 제방에 위치한 테반 묘지에 위치한 18왕조의 고대 이집트 무덤입니다. 이 무덤은 현재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유명한 장식 무덤 장면의 출처였습니다.
<본문>
잃어버린 네바 문 무덤은 이집트의 테베 (현재의 룩소르)에있는 나일강 서쪽 기슭에 위치한 테반 네크로 폴리스 (Theban Necropolis)에 위치한 제 18 왕조의 고대 이집트 무덤이었습니다. 무덤은 현재 런던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수많은 유명한 장식 무덤 장면의 원천이었습니다.
무덤의 위치는 굴착기 간의 경쟁 기간 동안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발견 당시 공개되지 않았으며 이후 잃어 버렸습니다. 2008-09 년의 과학적 분석은 Dra 'Abu el-Naga'근처에 있는 무덤의 위치를 나타 냈습니다.
<발견>
기원전 1350 년경에 살았던 네바 문은 테베의 사원 단지에 있는 중급 공무원 서기관이자 곡물 카운터였습니다. 그의 무덤은 1820 년경 영국 총영사 인 헨리 솔트 (Henry Salt)에서 일하던 젊은 그리스인 조반니 ( "Yanni") d' Athanasi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발굴된 인공물 >
무덤의 회 반죽 벽은 활발한 프레스코 화 그림으로 풍부하고 능숙하게 장식되어 네바 문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상적인 견해를 묘사합니다. D' Athanasi와 그의 노동자들은 문자 그대로 칼, 톱 및 쇠 지렛대로 원하는 조각을 해킹했습니다. 소금은 이 작품들을 1821 년에 대영 박물관에 팔았지만 다른 조각들 중 일부는 베를린과 아마도 카이로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D' Athanasi는 나중에 무덤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 않고 빈곤 속에서 사망했습니다. 무덤의 그림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습지에서 사냥하는 네바 문 닭, 연회에서 춤추는 소녀, 정원의 연못 등이 있습니다. 2009년 대영 박물관은 무덤에서 복원된 11 개의 벽 조각을 전시하기 위한 새로운 갤러리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살아남은 가장 위대한 그림들과 박물관의 가장 위대한 보물들 중 하나로 묘사되어 왔다. 회화의 다양한 장면은 현대에 예술가들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로렌스 알마 - 타 데마 (Lawrence Alma-Tadema)는 요셉, 파라오의 그라나리 감독관 (1874)에 묘사 된 벽 장식을 위해 거위 떼를 모으는 장면을 통합했으며 폴 고갱 (Paul Gauguin)은 연회 장면의 일부를 그의 타 마테 (Ta Matete, 1892)
[위키영어백과번역]
연못이 있는 정원
작자 미상, 기원전 1420~1375, 벽화(부분) 164 × 76㎝,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이 그림은 이집트 8왕조의 유력 정치가였던 네바문의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의 일부분이다. 네바문 무덤은 테베의 서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벽에서 나온 파편에 묘사된 연못에는 틸라피아 물고기, 물위를 걷고 있는 새, 연꽃들이 가득하고 연못가에는 파피루스가 자라고 있다.
연못의 주변에는 야자나무, 맨드레이크, 여러 관목들이 보인다. 마치 신의 시선인 것처럼 위에서 내려다 본 그림의 맨 아랫단 나무들은 깊이감을 창출하기 위해 잘못된 방향으로 심어져 있다.
나무의 여신 하토르는 맨 위단 오른쪽 모서리에서 정원의 선물(물병에 담긴 생명을 주는 물과 바구니에 담긴 과일)을 모으고 내세에 보호의 은총을 내리고 있다. 네바문과 아내 하트셉수트는 원래 이 장면의 오른쪽에 묘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토르는 ‘남쪽의 무화과 나무 여신’으로 알려졌는데, 무화과나무는 그녀에게 바쳐졌으며 일반적으로 생명을 상징한다. 고대 여신인 하토르는 소의 귀와 눈을 닮은 젊고 매력적인 여자로 종종 묘사되었다. 하토르의 정원은 새로운 삶을 상징하는 내세의 천국이며 틸라피아 물고기는 재생을 뜻한다.
시원한 남색과 풍부한 노란빛이 감도는 갈색, 그리고 정돈된 양식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네바문을 기다리고 있는 윤택한 내세의 기쁨들을 보여준다. 또한 관람자들에게는 약 4천 년전의 이집트인 생활상과 믿음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구글검색: "새오늘님"블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