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출발 09:05, 대련도착 09:20(약 1시간 소요)
-고구려 천리장성의 시발점인 비사성(차창 관광)
-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성해광장, 성해공원
-단동으로 이동(약 4시간소요)
-동항호텔(DONGGANG HOTEL)T.0415-755-6666
조식: 기내식, 중식: 동북요리. 석식: 한식
다롄 Dalian 大連
다롄은 중국 랴오닝 성 랴오둥 반도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1898년 러시아가 서구식 도시로 설계한 이후, 1905년 일본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랴오둥 반도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지리적으로 북한과 가까워 1958년 김일성이 다롄을 방문한 이래 중국과 북한의 외교에 있어 주요 도시로 주목받았다. 2010년에는 김정일이 다롄의 산업시설을 참관했고, 2018년 5월에는 김정은이 이곳에서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개요
중국 랴오닝 성에 있는 주요 도시. 주급(州級) 시의 행정중심지이다. 랴오둥 반도의 남쪽 절반을 이루는 5개의 현(縣)과 해군항인 뤼순[旅順:옛 이름은 포트아서]이 포함된다. 랴오닝 성에서 선양 다음의 대도시로, 20세기 초 러시아와 일본의 지배 아래 산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1950년대 이후 중공업과 경공업이 골고루 발전했으며 1990년대 개방 정책 이후 중국 동북 지방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가 되었다.[다음백과]
성해 광장 星海广场
아시아에서 가장 큰 광장
다롄의 역사
고조선이 최초로 이 지역을 지배했던 왕조이다. 이후에는 중국계 한족 왕조가, 그다음에는 북방 선비족들이 대를 이으며 차지했다. 고대 한국계 왕조인 고구려가 이 일대를 북방 민족과 한족으로부터 다시 정복하여 비사성이라고 불렀다. 이후 당나라, 발해, 거란, 여진, 몽골을 거쳐 명나라 때는 삼산포, 삼산해구, 청니와구라고 칭했다. 1880년 대에 청나라가 다롄만 북쪽 해안에 포대를 쌓아 올려,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 후 1898년, 삼국 간섭의 대상으로서 청으로부터 관동주(다롄, 뤼순 등)를 조차한 러시아가 둥칭철도의 종착역을 마련해 「다르니」(Дальний; 「멀다」)라고 명명했다. 뤼순에 있는 함대와 요새의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또 무역의 거점 항구로 정비하여 파리를 모델로 한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 의해, 동년 5월 말에는 일본군이 무혈 입성하여, 전후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일본에 조차권을 양도했다. 일본은 고지도의 중국어의 지명 「다롄만」에서 나온 「다롄」을 도시명으로서 채용했다. 이는 러시아 지명 다리니와도 발음이 비슷하게 연관된다.[위키백과]
다롄의 역사
러시아의 조계 시대는 현재의 다롄역에서 동쪽의 구분과 극히 일부의 건축물이 생긴 상태였다. 일본은 다롄을 무역도시로서 발전시키기 위해, 관동도독부와 남만주철도와 같은 사회 간접 자본 정비를 속행시켰다. 그 결과 도로의 아스팔트 포장이나 벽돌로 지은 건축물이 나란히 서는 불연건축물이 완성되었다. 초기에는 현재의 다롄역과 그 역 일대가 정비되어 구시가가 거의 현재의 형태가 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일중립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이 참전하여 다롄을 점거했다. 동년 9월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안소우호동맹조약에 근거해 소련은 다롄항을 뤼순항이나 남만주철도와 함께 계속해 관리하에 두었다.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는 것은 1951년의 일이다. 그래서 국공내전 중에도 이 지역은 국민당 측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고, 시종 공산당 측에 있었다.
1951년에 뤼순 시를 합병해, 뤼다라고 개칭했지만, 1981년에 원래의 다롄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렸다. 1990년대의 개혁개방 경제 아래, 중국 동북부 내에서도 특히 눈부신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위키백과]
성해광장은 1993년 7월에 조성하기 시작해서 1997년 6월 30일 완공되었으며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베이징에 있는 천안문 광장의 4배 규모인 176만㎡에 달한다. 80개에 달하는 다롄의 광장 중에서 가장 볼만 하지만, 광장이 너무 넓어서 전 구간을 걸어서 돌아보기는 어렵다. 자전거를 대여해 하이킹하거나,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라면 마차를 타고 한 바퀴 둘러보아도 좋다.[위키백과]
성해광장의 여행자는 대부분 갓난아이부터 100세 노인까지 1000명의 발자국이 새겨진 80m의 길을 따라 걸으면서 성해 광장 여행을 시작한다. 바다 쪽을 향해 걷다 보면 커다란 책을 펼쳐 놓은 것처럼 생긴 조형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위에 올라가서 광장 전체를 조망하는게 재미있다.
광장 가운데 한백옥(汉白玉)으로 만든 화표(华表, 중국의 전통 건축에 사용되는 기둥)를 주목해서 보자. 천안문의 화표보다 10m나 높은 19.97m로,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것을 상징한다. 광장 옆으로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면 가슴이 뻥 뚫린다. 한낮에는 햇볕을 피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기왕이면 해질 녘 방문하는게 좋다.[다음백과]
동북 요리(东北菜/dōngbĕi cài /똥베이 차이)
동북 요리(东北菜)는 추운 날씨의 영향으로 짜고 매운 음식들이 많습니다.
다롄(大連)에서 단둥(丹東)으로 이동 (약 4시간소요)
비사성(卑沙城), 또는 사비성(沙卑城)은 중화인민공화국 다롄시 진저우 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이다. 옛 고구려의 수군기지인 장산 군도와 가까우며, 고구려-당 전쟁 당시 주요 해전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위키백과)
단둥(丹東) 동항호텔
(DONGGANG HOTEL)
랴오닝성, 요녕성
(辽宁省,遼寧省,Liáoníng Shěng)
1.개요
랴오닝성(辽宁省)은 중국 동북부의 성급 행정구역이다. 성도는 선양시(沈阳市). 행정상 간칭은 랴오(辽liáo)이다.
서쪽은 허베이성, 북쪽은 내몽골 자치구, 동쪽으로는 지린성, 남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한다. 서남쪽으로는 황해, 보하이만과 접한다.
2. 설명
한국사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인 요동과 요서 지방을 합쳐서 요령이라 한다.
그 유명한 랴오허(辽河)가 성 중심부를 관통하며 요하를 기준으로 서쪽을 랴오시(辽西)라 부르고 동쪽을 랴오둥(辽东)이라 부른다.
요하 하구에 위치해있다 보니 광활한 평야를 지니고 있는데, 이 지역은 개발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요택(遼澤)이라 불리는 거대한 늪지였다. 고구려가 정복했던 땅이기도 하다.
대도시도 엄청나게 많다. 이 성의 인구만 4,000만 명이 넘는다. 그러나 인구가 많다고는 하지만 2000년대 이후로부터는 출산율이 매우 낮아져서 1,000명당 출생률은 6명대이고 출생아수는 27만 명대에 머물고있다. 인구도 매년 유출되는 중. 이건 지린성이나 헤이룽장성도 비슷하게 겪는 문제이다.
인구의 84%가 한족이고, 만주족은 인구의 13%에 달한다. 동북 3성 중에는 만주족이 많은 편이다.[4] 그 외에 몽골족이 2%, 조선족과 회족은 각각 0.6%이다. 옆 지린성에 비하면 조선족 인구는 적은 편. 특히 만주족 비율은 랴오닝성 동부 산지 쪽에서 높게 나타나며, 랴오닝성 동부에 6개 자치현이 있다. 특히 심양의 둥링구(东陵区)에 만주족의 비율이 높다.
랴오닝성의 남부 쪽은 지린성,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처럼 여행에선 유의해야 한다. 여행 유의 지역은 아니지만 북한과의 접경지대이기 때문. 이곳은 북한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는 지역으로 납북의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에서 지정되었다. 설마 그럴 일이 있겠느냐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도 일반적인 관광객이 납북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긴 하지만 성 전체에 북한 공작원들이 파견되어 있는 것은 명백하므로 주의해야 하는 게 사실이며, 특히 중국을 기점으로 북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은 대개 여기서 납북당했다. 물론 심양에서는 그런 일이 없고 한국인들이 많이 산다.
특히 단둥시는 북한 국경지대로 신의주시와의 접경이기 때문에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인데, 북한 국가안전보위성 소속 스파이들이 가장 많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편이다. 한국인일 경우 탈북하려는 북한 주민이나 선교사 등으로 오인받아 납북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으로 이 점은 연해주의 하산이나 블라디보스토크, 자르비노 등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중국/러시아와 북한 접경 도시들에는 여행유의 경보를 내려 납북을 주의하도록 하고 있다.[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