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남미 5국

남미(79)아르헨티나,국내선,엘칼라파테공항(El Calafate)→이과수,호르헤뉴베리공항,,피아졸라(2019.1.26)

여행복사꽃 2023. 7. 18. 15:22
이른 아침!!! 엘 칼라파테 마을을 뒤로하고 공항으로!!!
멀리 아르헨티노호!!!
뉴턴하여 공항으로!!!

▼엘 칼라파테 공항

El Calafate Airport
Aeropuerto Internacional Comandante Armando Tola de El Calafate

세상의 중심은 아메리카 대륙(우리와 다른 세계지도의 배치!!!)
엘 칼라파테 공항!!!

▲호르헤 뉴베리 공항

Jorge Newbery Airport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에 있는 공항으로 군용으로도 사용하는 국제선 공항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북동쪽으로 2km 떨어져 있다. 아르헨티나의 유명 비행사인 호르헤 뉴베리(1875~1914)에서 이름을 따왔다.
국적항공회사인 아르헨티나항공,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기반으로 운항하는 아우스트랄항공(Austral Líneas Aéreas), 란아르헨티나항공(LAN Argentina)의 허브공항이며 PLUNA·솔항공(Sol Líneas Aéreas)이 취항한다. 평균해면고도는 5m이다. 활주로는 콘크리트로 되어 있으며 길이는 2,100m이다. 아르헨티나공항2000S.A.(Aeropuertos Argentina 2000 S.A.)가 운영한다. 총면적은 138ha이다.[네이버지식백과]

▲라플라타강 la Plata

라플라타 강(스페인어: Río de la Plata 리오 데 라 플라타 포르투갈어: Rio da Prata 히우 다 프라타)는 우루과이 강과 파라나 강이 합류하여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남아메리카의 삼각강이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국경을 이루며, 강 남측에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북측엔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가 있다.[여행책자]

♣ 부에노스 아이레스

(Buenos Aires) 
탱고의 본고장, 
라플라타 강어귀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는 1536년 스페인 귀족 출신인 페드로 데 멘도사(Pedro de Mendoza)에 의해 건립되었습니다. 초기에는 계속되는 가난과 원주민 인디언들의 침입으로 1573년 초기 정착민들이 아순시온의 상류 지역으로 피난을 가게 될 정도였습니다. 그 후 40년이 흐르고 1580년에 환 데 가라이(Juan de Garay)에 의해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제대로 된 도시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라틴아메리카에서도 가장 활기차며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도시의 분위기는 유럽의 느낌이 물씬 풍기며, 유명한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욕망의 힘이 넘치는 거대한 도시"라고 찬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남미의 파리라고도 불리며, 약 100여 개의 미술관과 극장, 박물관 등이 몰려 있는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중심지로부터 몇 블록만 떨어져도 전통적인 장소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처음 보는 여행객에게도 이웃처럼 대하는 동네 사람들이나 바의 주인들을 보면 정겨움이 넘칩니다. 또한 거리 곳곳에서 탱고 무희들을 볼 수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태어난 도시답게 아름다운 시구들도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도시 중앙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극장, 카페, 서점 등은 "결코 잠들지 않는 거리"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릴만합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연평균 기온 17℃의 전형적인 온대성 기후로, 삼한사온의 온도 변화를 보입니다. 특히 가을 하늘은 세계적으로 맑기로 유명하며, 여름은 무더우나 찌는 더위는 없고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없어 지내기 좋습니다.[여행책자]



아바스토 호텔

(ABASTO HOTEL BUENOS AIRES)


부에노스 아이레스 한식집 "향가"

부에노스 아이레스 한인촌


▼ 부에노스 아이레스 "피아졸라 탱고" 쇼장으로 가는 길목

아스토르 피아졸라, 이 도시와 멱살잡이하다

나는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라났고 파리에서 내 길을 찾았다. 그러나 내가 무대에 오를 때, 사람들은 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음악을 연주하리라는 걸." 우리가 '탱고'라면 가장 먼저 떠올릴 이름.

가장 유명한 작곡자이며 탁월한 반도네온 주자,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olla).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그는 만날 때마다 멱살잡이를 하는 애증의 관계였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쪽 바닷가의 도시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뉴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기에서 처음 '반도네온'을 손에 잡았고, 카를로스 가르델의 꼬마 통역 겸 반주자가 되어 그를 쫓아다니기도 했다.

(가르델이 카리브 해 순회에 그를 데려가려던 걸 아버지가 막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반도네온 연주자로 크게 주목받지만, 새로운 탱고 음악을 만들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번번히 거부당했다.

축구팀 보카 주니어스의 팬클럽을 위한 카니발에 자신의 편곡을 선보였다가 "여기가 콜론 극장이냐"며 끌려 내려오기도 했다. 낙담한 그는 탱고를 떠나 클래식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나디아 블랑제의 가르침을 받다, 자신의 진짜 음악은 클럽에서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던 그 '탱고'임을 깨닫는다.

이렇게 탄생시킨 새로운 탱고(Nuevo Tango)는 이 음악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은 여전히 반발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모든 것이 바뀌게 마련이다. 탱고를 빼놓고." 그는 맞섰다. “내 음악이 탱고가 아니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아르헨티나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극장식 식당 겸 갤러리가 있다(Piazolla Tango). 그가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었던 콜론 극장에도 그 숨결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홈베이스였다 사라진 클럽 '676' 근처를 배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피아졸라는 부유하는 존재였고, 하나의 장소로 그를 기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그의 고향 마르 델 플라타로 날아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거기에 아스토르 피아졸라 국제공항이 있다.네이버


▼ 피아졸라 탱고 쇼 장소

♣ 탱고 tango

탱고(Tango)는 1880년대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의 경계 지역인 라플라타 강을 따라 기원한 파트너 댄스의 하나로, 곧 전 세계의 나머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2009년 8월 31일, 유네스코는 탱고를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목록에 포함시키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공동 제안을 승인했다.[위키백과]

 탱고 tango

스탠더드댄스(standard dance) 종목 중 하나. 1880년 무렵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하층민 지역에서 생겨났다. 탱고가 처음 등장할 때의 명칭은 ‘바일리 꼰 꼬르떼(baile con corte)’였는데, 그것은 ‘멈추지 않는 춤’이라는 뜻이었다. 그 후 명명된 탱고라는 용어의 기원은 남아메리카로 여겨지며 ‘만남의 장소’, ‘특별한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탱고 자체가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탱고가 탄생할 무렵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성은 목이 긴 부츠에 쇠발톱(spur)을 달고 가우초(gaucho)라는 바지를 입었으며, 여성은 풍성한 스커트를 입었다. 그와 같은 복장으로 춤을 추려고 애쓰는 과정에 역설적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동작들이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 탱고의 기본 동작이 확립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탱고의 비약적인 발전은 19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의 탱고는 경쾌하고 활기찼으며, 1915년 무렵 유럽에도 전해져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1920년대가 되자 탱고의 분위기가 바뀌어 우수의 정서를 띠게 되었다. 아울러 스텝도 실내 무도 스텝으로 부드럽게 변했다.

탱고의 특징 중 하나는 라이즈 앤드 폴(rise and fall) 없이 일정한 자세를 유지하며 추는 춤이라는 점이다. 탱고 음악의 기본적인 리듬은 4분의 2박자이며 각 박자에 악센트가 있다. 템포는 1분간 30~34소절로 연주된다. 탱고 음악 역시 처음에는 촌스러운 댄스 음악으로 무시되었으나, 실력 있는 음악가들의 공헌으로 점점 감상할 만한 가치를 지닌 음악으로 인정받았다. 열정적이고 감각적이며 감칠맛 나는 탱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미지로 기억된다. 탱고는 우울한 분위기의 춤이라는 일부 평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네이버지식백과]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대중음악인 탱고의 기본 리듬은 스페인의 까디스(Cádiz) 탱고가 스페인의 사르수엘라와 함께 아르헨티나에 소개되어 끄리오요들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그 후 쿠바의 대무 영향을 강하게 받는데 특히 쿠바의 춤곡인 아바네라가 탱고의 기본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쿠바의 춤곡은 19세기 중엽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소개되는데 후에 아르헨티나의 색채가 가미되어 밀롱가로 바뀌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깡돔베 의식의 리듬이 곁들어져 탱고가 되었다고 한다. 1880년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항구 지역에서 구체적으로 형성된 탱고는 세기가 바뀌면서 풍부한 음악전통으로 발전하였다. 초기의 탱고는 바이올린, 플루트, 클라리넷, 아코디언 등으로 연주되었으나 그 후 독일에서 수입된 아코디언과 같은 부류의 악기인 반도네온이 1880년경 추가되고 피아노가 곁들여져 1910년대에는 탱고 특유의 오케스트라가 등장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음악으로서는 최초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탱고는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의 음악 장르도 보편성을 획득하며 대중사이에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 사례가 된다. 라틴계 민족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탱고는 일반적으로 시원스러운 동작과 함께 정열적인 리듬으로 연주된다. 가사가 곁들어진 탱고 음악도 있는데 주로 불란서의 샹송과 같이 이야기 형태를 띠고 있다. 가사 내용은 오랜 바다 생활에 지친 뱃사람들의 고독과 향수 그리고 젊은 연인들 사이의 실연을 노래한 것이다. 아르헨티나 작가인 보르헤스는 탱고에서 아르헨티나인들의 정신세계를 읽어 내고 있다. 탱고에서 두드러지는 에로틱한 유희를 한 껍질 벗기면 아르헨티나인들의 가치관과 명예를 지켜내는 용감성이 깔려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네이버

▲엠파나다 Empanada

우리나라의 만두와 비슷하게 생긴데다 내용물도 고기와 채소로 가득 차 있어 한국 사람의 입맛에 잘 맞는 아르헨티나 서민 음식이다. 개당 $3 정도이며 엠파나다 데 카르네(Empanada de Carne)는 쇠고기, 엠파나다 데 포요(Empanada de Pollo)는 닭고기로 이루어져 있다.[여행책자]

탱고 tango

1880년 무렵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하층민 지역에서 생긴 사교춤.

스페인의 탱고와 빠르고 육감적이며 평판이 좋지 않은 아르헨티나의 밀롱가가 혼합되었으며, 쿠바의 하바네라에서도 영향을 받았으리라 여겨진다. 1900년대초에 사회적으로 용납되었고 1915년경에는 유럽 사교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알려진 작곡가가 만든 최초의 탱고 음악은 1910년 무렵에 출판되었다. 초창기 탱고는 활기차고 쾌활했으나 1920년대가 되자 그 음악과 가사가 극도의 우수를 띠게 되었다. 스텝도 초기의 활기찬 스텝에서 부드러운 실내 무도 스텝으로 변화했다. 탱고 음악은 4/4박자이다. 스페인 탱고는 플라멩코와 음악의 경쾌한 변형이며 아르헨티나 춤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여겨진다.[다음백과]

탱고 tango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구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초기에는 지방의 댄스음악 정도로 여겨지던 탱고가 점차 세계화된 것은 뛰어난 연주자들의 출현과 함께 그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탱고 음악가로는 〈엘 초끌로(El Choclo)〉를 작곡한 앙헬 비욜도(Angel Villoldo), 〈라 보로차〉를 작곡한 엔리께 사보리도, 반도네온의 명연주자 비센떼 그레꼬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후안 데 디오스 필리베르또는 〈까미니또〉 등 서정미가 넘치는 아름다운 곡을 남겼으며 엔리께 산또스 디세뽈로(Enrique Santos Discépolo)는 〈지라 지라(Yira, yira)〉 외에 인생관을 반영한 작품들을 남겨 탱고 음악을 발전시켰다.

탱고는 크게 보아,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대로 아르헨티나의 전통과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 전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춤곡으로서 유럽에 소개된 탱고는 아르헨티나 것이 각색된 것으로 특히 1913-14년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사교댄스나 살롱뮤직에 적합한 세련된 형태의 콘티넨탈 탱고가 되었다. 처음에는 2/4박자로 연주되었던 탱고는 이후 4/8박자로 바뀌면서 더 감상적이고 우수에 젖은 곡조가 되었으며 1920년대에 이르러 서양에서 가장 인기있는 춤 중의 하나로 자리잡는다. 멜로디가 우아하고 목가적이며 리듬감도 부드럽고 선율을 중시하여 연주된다.[네이버지식백과]

미국에서의 탱고

1914년에는 미국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세계적인 무성영화 배우인 루돌프 발렌티노(Rodolfo Valentino)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전설적인 아르헨티나 가수 까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 1887.-1935.)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탱고를 전세계로 보급시킨 장본인이다. 특히 바리톤 가수인 가르델은 중남미가 낳은 20세기 최초의 슈퍼스타로서 1910년대에 민요 가수로 지방에서 인기를 얻은 후 1920년대 초부터는 탱고를 전문으로 하였다. 그는 표현력이 풍부한 목소리와 사랑스러운 매력을 가지고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가 죽은 지 60년이 지나도록 수백만의 중남미인들은 그를 가장 훌륭한 가수로 꼽고 있다. 콘티넨탈 탱고 악단 중에서는 헝가리 출생의 바이올린 연주자 바르나바스 폰케 지,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 마레크 베버의 악단이 유명하다.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 있었던 탱고의 주도권은 점차 소멸된다. 비록 아방가르드 탱고 음악가인 아스또르 피아졸라가 1970년대와 80년대에 국제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하더라도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의심스럽고 사실상 그의 작품은 대중음악의 경계를 넘은 것이었다. 특히 탱고는 1950년대에 국제적인 팝 음악뿐 아니라 아르헨티나에서 종종 신음유시(neofolkrore)라 불리는 새로운 음악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의 음악가들은 지방음악의 풍부한 전통에 관심을 기울여 사라져가는 리듬과 노래를 채집할 뿐 아니라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음유시적인 언어를 노래의 바탕으로 삼기도 하였다.[네이버,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이해]

♣ 오벨리스크

오벨리스크 (Obelisk, 고대 그리스어: ὀβελίσκος 오벨리스코스[*]) 또는 방첨탑(方尖塔)은 높고 좁으며 4개의 면을 지닌, 점점 가늘어지는 피라미드 모양의 꼭대기를 지닌 기념 건조물이다. 고대 방첨탑은 한 덩어리의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스텔레'라는 말은 고전적인 방첨탑 형태로 새겨지지 않은 기념비에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오벨리스크에는 전승을 기념하거나 왕의 위업을 과시하는 문장이나 모양을 새겼는데, 태양 숭배 즉 태양신 라 혹은 호루스 와도 관계가 있다고 한다. [위키 백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벨리스크

부에노스아이레스 7월9일 대로에 우뚝 솟아있는 오벨리스크는 1936년 아르헨티나 조각가 ALBRTO PREBISCH가 제작하여 세운 기념탑인데 오벨리스크 4면을 돌아 가면서 아르헨티나 역사에 중요한 기념적인 사건을 각인했다고 한다. 첫째는 15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시 창립일이고, 둘째는 15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시의 발전을 축하하고, 셋째는 18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르헨티나 연방수도로 정해진 것을 기념하고, 넷째는 국기가 처음으로 산니콜라스 교회에 게양된 것을 기념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 오벨리스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시의 주요 상징적인 건축물이며, 모든 주요 문화 행사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모든 길은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계획되어 있습니다.[여행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