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미국 & 캐나다

2019북미(53)캐나다,퀘벡,샤토프롱뜨낙호텔(Le Chateau Frontenac)(2019.8.8)

여행복사꽃 2023. 9. 2. 18:30

▼퀘백 HOTEL GOVERNEUR(구베르너 호텔)

사뮈엘 드 샹플랭

Samuel de Champlain는 17세기 프랑스의 탐험가이다. 캐나다의 식민지 개척자이고 뉴프랑스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청년시절 앙리 4세 치하에서 위그노전쟁에 종군하였고, 훗날 왕명으로 캐나다를 탐험(1603∼1607), 세인트로렌스강과 포트로열항을 조사하고 퀘벡을 건설하였다(1608). 그의 이름을 붙인 섐플레인호(湖)를 발견하여, 그 지방 경영을 담당하는 한편, 모피 거래에도 손을 대고, 초대 총독이 되었다(1620). 1628년 리슐리외에 의하여 식민지측의 감독으로 뉴프랑스의 멤버에 지명되었다. 그는 1629년 영국의 퀘벡 침입 때 포로가 되었으나, 1633년에 복귀하여 퀘벡에서 죽었다. 그의 탐험기는 영국에서 1659년, 프랑스에서는 1670년 각각 출판되었다.[두산백과]


▼아브라함 평원

(Plains of Abraham)

아브라함 평원 전투(Battle of the Plains of Abraham) 또는 퀘벡 전투(Battle of Quebec, 프랑스어: Bataille des Plaines d' Abraham, Premiere bataille de Quebec)는 7년 전쟁(북미에서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중추가 되는 전투이다. 1759년 9월 13일에 퀘벡 요새 밖에 있는 아브라함 평원에서 영국 육해군과 프랑스 육군의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원래 이곳은 아브라함 마틴이라는 농민이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 전투의 이름의 유래가 된 것이다. 이 전투는 양군 모두 1만명 미만의 부대가 투입되었지만, 이후 캐나다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2], 누벨프랑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점에서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전쟁에서 최대 고비가 되었다.[위키백과]


샤토프롱뜨낙호텔

(Le Chateau Frontenac)
캐나다 퀘벡의 고전양식의 호텔이다. 성채도시인 퀘벡의 세인트로렌스강이 내려다 보이는 성곽에 위치하는 호텔 건물이다. 미국인 부루스 프라이가 설계하였고 최초 호텔의 착공은 1893년에 시작되어 1983년에 완공될 때가지 1세기동안 계속되었다. 호텔의 본관 건물 지붕이 녹색의 청동으로 되어 있어 중세의 궁전과 같은 우아한 양식을 보여준다. 600여 개의 호화로운 객실을 갖추고 있고, 우아한 살롱으로 인기가 높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결정한 연합군 회의가 열렸던 곳으로 유명하다.[두산백과]

샤토 프롱트낙 호텔은 1893년에 건립된 호텔로, 캐나다 국립 사적지로 지정된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호텔의 이름은 프랑스 식민 시대의 총독이었던 프롱트낙 백작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청동 지붕과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샤토 프롱트낙 호텔은 르네상스 시대의 샤토 스타일로, 플라스 다름의 남쪽 세인트로렌스 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우뚝 서 있어 퀘벡 시티 어디에서나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프랑스 문화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퀘벡의 상징물로 꼽히고 있다.
퀘벡 주 홍보 사진의 90% 이상이 이 호텔의 모습을 담고 있을 정도로 샤토 프롱트낙 호텔에 대한 퀘벡 시민들의 자부심은 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이 회담을 한 장소로도 유명하며 오늘날에도 퀘벡 시티를 방문하는 많은 유명 인사들이 찾고 있다.
객실은 총 600여 개로 이 가운데 스위트룸만 33개에 이른다. 유서 깊은 호텔이므로 함부로 개조, 보수하거나 가구를 교체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다.
내부는 궁중 스타일의 가구와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으로 꾸며 19세기 유럽의 고전미를 느낄 수 있다. 숙박을 하지 않더라도 퀘벡을 방문한 여행자라면 한번쯤 들리게 되는 명소이다.
가이드를 따라 호텔을 둘러보며, 이 곳을 거쳐 간 수많은 유명 인사들과 그들이 남긴 다양한 에피소드를 들어 볼 수 있다.
호텔 바로 근처에는 아름다운 산책로인 테라스 뒤프랭이 있어 관광객과 투숙객의 쉼터가 되고 있다.
세인트로렌스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약 400m의 테라스 뒤프랭 산책로는 퀘벡 제일의 전망을 자랑하며, 강의 폭이 좁아 강 건너편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여름에는 길거리 공연이 열리며,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어 멀리까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네이버]

샤토 프롱트나크(Château Frontenac)는 캐나다 퀘벡주 퀘벡 시의 랜드마크 호텔이다. 1980년대 캐나다 국립 사적지로 지정되었다.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총리의 회담이 있었다.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위치하고 있으며, 청녹색으로 올라간 구리 지붕과 벽돌로 벽을 처리하고 창문에 흰색 테두리 장식이 특징인 프렌치 로마네스크 풍의 건축물이다. 증축 결과, 고층 빌딩과 그것을 둘러싼 5동의 저층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600개의 객실을 가지고 있다. 1953년, 알프레드 히치콕이 제작한 영화 《나는 고백한다》(I confess)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2016년 방영된 tvN 금토드라마 《도깨비》에서도 배경과 시설물이 소개되기도 했다.

역사
캐나다 태평양 철도(CPR)의 사주였던 윌리엄 고넬리우스 밴 혼(William Cornelius Van Horne)의 제안에 따라 지어진 호텔이다. 철도 회사가 부유층 이용객을 유치하기 위해 호화스러운 여행을 장려한다는 시책의 일환으로 지어진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지어진 샤또(Château) 스타일의 호텔 중 하나로, 앨버타의 ‘밴프 스프링스 호텔’과 함께 사주와 친했던 건축가 브루스 프라이스에 의해 설계되었다. 사적인 퀘벡 시타델에서 가까운 곳에 17세기 후반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1893년에 개업했다.
누벨 프랑스의 총독(1672년 - 1682년, 1689년 – 1698년)이었던 프롱트나크 백작 루이 드 부아드(Louis de Buade de Frontenac)의 작위 명을 따서 호텔 이름이 지었다.

1943년 8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략을 논의했던 퀘벡 회담에서 많은 내빈이 샤토 프롱트나크에 머물렀다. 이때, 당시 캐나다 총리였던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도 초대되었다.

호텔은 세인트로렌스강이 내려다 보이는 곶의 고지대에 있어 전망이 매우 좋다. 7년 전쟁 중 북미의 전장이었던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759년 9월의 아브라함 평원 전투가 근처에서 벌어졌다.

현재는 토론토에 본사를 두고 있는 페어몬트 호텔즈 앤 리조트가 운영하고 있다.[위키백과]

사뮈엘 드 샹플랭

Samuel de Champlain
프랑스의 탐험가로 1608년 퀘벡을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대륙에서 프랑스 식민지를 개척하는 데 많은 공적을 세웠다.
1609년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된 섐플레인 호를 발견했으며, 현재의 뉴욕 북부, 오타와 강, 그레이트레이크의 동부지역을 탐험하기도 했다.

평민 태생으로 추정되는 샹플랭은 서인도제도와 중앙 아메리카의 탐험에 참가하여 항해가로서 명성을 얻었고, 헨리 4세의 왕실에서 수여하는 비공식적인 명예귀족의 칭호를 받았다.

1603년 캐나다 강(지금의 세인트로렌스 강)의 탐험에 참가했다. 당시 여름에 무역항으로 사용되고 있던 타두삭 항에 닻을 내린 모함에서 대형 보트를 타고 출발한 그는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지금의 몬트리올과 강의 급류지역들을 탐험했다. 그의 탐험보고서는 프랑스에서 곧 출판되었다. 1604년 펀디 만을 둘러싸고 있는 아카디아 지역의 정착민과 함께 그곳에 도착했다.

샹플랭은 아카디아에서 3번의 겨울을 지냈다. 세인트크로이 강에서 보낸 첫번째 겨울에 괴혈병으로 정착민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아나폴리스 분지에서 보낸 2번째와 3번째 겨울에는 인명손실이 비교적 적었으며, 여름에는 식민지 건설에 적합한 지역을 물색했다(아나폴리스로열). 그는 남쪽으로 대서양 해안까지 탐험하여 매사추세츠 만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그는 당시 프랑스의 경쟁국이었던 영국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항구에 대한 상세한 지도작업을 수행했다. 1607년 영국은 아카디아 남부, 현재의 메인 주인 케네벡에 도착했다. 영국인들은 단지 한겨울에만 그곳에서 보냈지만, 영국인과의 충돌에 대한 우려로 프랑스는 그 지역을 식민지화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608년 그가 이끄는 프랑스 탐험대는 프랑스를 출발하여 그의 야심에 찬 계획인 퀘벡의 설립을 추진했다.

이전의 탐험에서는 탐험대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나, 그때 그는 32명의 식민지 개척자를 직접 지휘했다. 퀘벡에서 보낸 첫번째 겨울 동안 살아 남은 사람은 그와 나머지 8명뿐이었다. 그러나 6월에는 보다 많은 식민지 개척자들을 받아들였다. 프랑스가 이전에 맺었던 북부 인디언 부족과의 조약을 근거로 그들과 동맹을 맺고, 섐플레인 호에서 이로쿼이 인디언과 소규모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동부 산림지대 인디언). 이 전투와 1610년 전투에서의 승리는 동맹을 맺은 인디언 부족들 사이에 프랑스의 공신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결과 프랑스와 인디언 간의 모피거래가 늘어났다. 1610년 그는 프랑스로 돌아와 프랑스 왕실 신하의 딸인 엘렌 불레와 결혼을 했다.

1611년 모피거래로 많은 금전적 손실을 입자, 퀘벡에 대한 후원자들은 식민지를 포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샹플랭은 루이 13세를 설득하여 식민지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결국 프랑스 왕은 퀘벡의 총독을 임명했으며, 이때 임명된 총독은 샹플랭을 뉴프랑스의 지휘관으로 삼았다.

1613년 샹플랭은 퀘벡에서 다시 그의 사회적인 권위를 되찾게 되었으며, 단절된 모피거래를 재개하기 위해 즉시 오타와 강으로 진출했다. 그 다음해 무역과 선교 그리고 자신의 탐험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 상인들의 회사를 조직했다. 그후 그는 휴런 호(湖)로 가서 그곳의 인디언 추장에게서 온타리오 호 남부의 이로쿼이족(族)에 대항하여 싸우는 부대의 지휘권을 맡아줄 것을 부탁받았다.

그는 이로쿼이족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으며, 조직이 잘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충성스러웠던 그의 휴런-알공킨 부대는 전투에 패해 와해되고 말았다. 부대원에 의해 무사히 탈출한 그는 겨울을 그들의 영토에서 보낸 뒤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당시 프랑스의 정책은 식민지의 장래를 매우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1620년 국왕은 다시 퀘벡에서 샹플랭의 권한을 강화시켜주었다.

그러나 더이상 개인적인 탐험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행정적인 일에만 전념하도록 했다.

식민지는 여전히 모피거래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농업은 그와 몇몇 회사의 후원에 의존한 실험경작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로부터 공인을 받은 개척자들은,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하고 있던 1628년에 퀘벡을 공격했다. 샹플랭은 그 다음해 여름까지 요새를 사수했지만 식량과 화약이 떨어져 요새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포로가 되어 영국으로 압송된 그는 식민지의 양도는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 끝난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1632년 식민지는 다시 프랑스로 귀속되었다. 1633년 그의 7번째 책이 출판되었고 1년이 지난 뒤 그는 마지막으로 퀘벡으로 갔다. 그가 퀘벡에 닻을 내렸을 때는 몇 명의 정착민들만이 있었지만, 매년 수많은 정착민들이 이주해왔다. 1635년 발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세인트로렌스 강 양안을 따라 개척지를 확장시켜나갔다.[다음백과]

▲사무엘 드 샹플랭 기념비

Monument à Samuel de Champlain
조각가 Paul-Romain Chevré가 제작한 Samuel de Champlain 기념비는 1898년 9월 21일부터 Château Frontenac 근처 Dufferin 테라스에서 퀘벡의 창립자인 Samuel de Champlain을 기리는 기념물입니다. 캐나다 퀘벡주 Vieux-Quebec 지역.  퀘벡시티의 상징 중 하나입니다.[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