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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11)페루,쿠스코공항,아르마스광장,12각돌,San Augustin El Dorado 호텔(2019.1.12)

여행복사꽃 2023. 6. 8. 23:10

10:09 쿠스코 도착
▷호텔 체크인 후 쿠스코 자유관광
[추천 자유일정]
-역사지구의 중심지 아르마스 광장 주위 산책을 하며 코리칸차, 대성당, 12각의 돌 등 관광
▦ San Augustin El Dorado 동급[4성급]

▼쿠스코 알레한드로 벨라스코 아스테테 국제공항

Alejandro Velasco Astete International Airport

쿠스코 공항은 페루 남부 쿠스코주(州)의 주도 쿠스코 도심에서 남동쪽으로 약 4km 거리에 위치한다. 1964년 12월 개항했으며, 리마 호르헤 차베스 국제공항(Jorge Chavez International Airport)에 이어 페루에서 두 번째로 이용객수가 많은 공항이다. 평균해발고도 3,310m의 고지대에 위치하며, 공항 코드는 CUZ(IATA), SPZO(ICAO)이다. 정식 명칭은 테니엔테 알레한드로 벨라스코 아스테테 국제공항(Aeropuerto Internacional Teniente Alejandro Velasco Astete)으로, 최초로 안데스 산맥 횡단비행에 성공한 페루인 비행사 알레한드로 벨라스코 아스테테(Alejandro Velasco Astete)를 기리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활주로는 3,397m×45m 크기로 총 1개소를 운영하며, 표면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 여객 터미널은 2층 규모로 한 동이며 관제탑의 높이는 12.50m이다. 취항 항공사로는 아에로수르(AeroSur)·란항공(LAN Airlines)·아비앙카(AVIANCA S.A.)·스타 페루 항공(Star Peru)·페루항공(Peruvian Airlines)의 5개사가 있으며 볼리비아 라파스(La Paz)·브라질 히우브랑쿠(Rio Branco)와 페루 국내 주요 도시를 연결한다.[두산백과]

▼쿠스코 Cuzco

안데스 산맥의 해발 3,399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널리 세력을 미쳤던 잉카 제국의 수도로서 '중앙부'라는 뜻의 케추아 인디언어에서 이름이 유래된 쿠스코의 역사는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와 주변지역으로 우아타나이 강이 흐르며 사크사우아만 요새, 태양신전, 주거지 등을 비롯해서 광대한 잉카 이전시대와 잉카 문명의 유적들이 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군대가 1533년에 쿠스코를 점령하여 약탈했다. 그 직후에 지방자치 시 당국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1650년에 발생한 일련의 지진들로 인해 도시가 거의 파괴되어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쿠스코는 후에 주로 그림·조각·보석류·장식목공품 등 훌륭한 예술품을 다량 생산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식민지시대에 건설된 중요한 건물들로 1654년 잉카 궁터에 완공된 대성당, 산안토니오아바드델쿠스코국립대학교(1692) 외에 교회·수도원·수녀원이 많이 있다.

상공업 중심지인 이 도시에서는 직물·양탄자·맥주가 생산된다. 교통의 요충지로서 비행기·도로·철도 등을 이용할 수 있다.[다음백과]

쿠스코(스페인어: Cusco, 문화어: 꾸스꼬)는 페루 남동부 쿠스코주에 있는 도시이다. 80km 북서쪽으로 마추 픽추가 있으며, 안데스 산맥 사이의 해발 3,399m에 있다. 현재 인구는 약 42만 8천명이다.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부엉이 바위(rock of the owl)를 의미하고 타완틴수유(Tawantinsuyu, 잉카 제국의 정식 명칭)의 수도이며,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페루에서 가장 유수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위키백과]

쿠스코

페루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고산도시. 해발고도 3,400m이고 과거 잉카 제국의 수도였으며, 근처에 마추픽추가 있다. 인구는 2007년 약 35만명, 2017년 기준으로 428,450명으로 페루에서 7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해발고도가 높아서 기후는 열대기후가 아니라 온대기후에 속한다.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을 의미한다.

고대 잉카인들이 하늘은 콘도르, 땅은 퓨마, 땅 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쿠스코는 도시 전체가 퓨마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고 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코리킨차 신전과 삭사이와만 섹시 우먼 성채 등이 있다.

쿠스코는 주위에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주위 골짜기로 시가지가 확장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하여 차 한대가 들어가기도 쉽지 않은 좁은 골목길이 다수 있어 스즈키 알토나 대코(?!)와 같은 경차가 택시로 자주 이용된다. 특히 한국 국내에서 생산된 중고 티코가 상당히 많이 이용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에 가면 한국어가 랩핑된 티코를 보는 것도 큰 재미가 될 것이다.

페루의 주요 고산도시인 와라즈(해발 약 3,450m)보다는 낮지만 고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기에 고산병에 주의를 요한다. 고산병에 취약한 체질이라면 꼭 저지대때부터 아스피린 100mg을 챙겨먹어 두는 것이 좋으며, 마테 또한 상당히 상태를 완화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상태가 악화될 경우 소로치를 꼭 복용하길 바란다.

참고로 북한의 개성, 일본의 도쿄, 중국의 시안 등과 자매결연을 맺었다.[나무위키]

쿠스코 Cuzco,Cusco

페루 남부 쿠스코주(州)의 주도(州都).
쿠스코는 안데스 산맥 해발 3,399m 지점의 분지에 있는 잉카제국의 수도로서 한때 1백만 명이 거주하였다.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이다. 잉카인들은 하늘은 독수리,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는데, 이러한 세계관에 따라 쿠스코는 도시 전체가 퓨마 모양을 하고 있다.

잉카신화에 의하면 티티카카호에서 태어난 만코 카팍과 그의 누이 마마 오클로가 1200년 경 쿠스코를 세웠다. 만코 카팍이 황금 지팡이를 두드리자 기적처럼 땅이 열리며 지팡이를 삼켰는데, 그 지점에 주춧돌을 놓아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쿠스코는 8세기 경에 이미 거주지가 형성된 곳이었다. 쿠스코가 잉카제국의 수도로 성장한 것은 1438년 만코 카팍의 18대손인 파차쿠티 왕 때이다. 파차쿠티 왕은 사피와 툴루마요 강에 수로를 만들고 두 강 사이 길고 가는 땅에 쿠스코를 건설했다. 도시는 잉카족이 신성시했던 동물 퓨마의 형상을 따랐는데, 퓨마의 머리 부분은 종교의 중심으로 필요 시 요새로 사용했던 사크사우아만, 퓨마의 꼬리는 인공수로가 끝나고 두 강이 만나는 지점인 푸마추판이다. 태양 신전 코리칸차는 퓨마의 허리, 제사를 지내던 무언카파타 대광장은 퓨마의 심장 위치다. 대광장을 중심으로 도로가 방사선 형태로 뻗어 있다.

쿠스코의 금박을 입힌 성벽과 보석이 달린 정원의 조각상들은 황금을 찾아 신대륙으로 온 유럽의 정복자들을 흥분시켰다.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자신의 병사 88명을 감시원으로 두고 잉카 제국의 보물을 약탈했다. 식민 통치자들은 잉카제국의 궁전과 신전 자리에 유럽 풍의 궁전과 종교 건축물을 세웠다. 태양 신전 코리칸차 터에는 산토도밍고 교회가, 와이나 카파쿠 궁전 터에는 라 콤파냐 헤수스 교회를 세웠고, 태양 처녀의 집 터에는 산타 카타리나 수도원을 지었다. 그 결과 쿠스코는 바로크 양식의 수려한 건축물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태양신전 코리칸차와 사크사우아만은 하나에 160톤이나 되는 거대한 화강암 잔해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밖에 식민지 시대에 새로 지어진 건물 중 중요한 것으로는 1654년 완공된 대성당과 1692년 완공된 산안토니오 아바드 델 쿠스코 국립대학교 등이 있다.

태양 신전은 흔적만 남았지만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영광을 찾아온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해마다 6월말 사크사이와만을 무대로 열리는 태양제 인티 라이미는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 볼리비아의 오르로 축제와 함께 남미의 3대 축제로 꼽힌다.[두산백과]


태양의 신전과 산토 도밍고 교회

(Qoricancha y Santo Domingo)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 자리에 세워진 산토도밍고 교회


페루 안데스 산맥 중앙에는 잉카 제국의 마지막 수도인 쿠스코가 있습니다. 쿠스코는 잉카인들이 썼던 케추아어로 '배꼽'이란 뜻을 갖고 있지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3360m에 건설된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수도로서 정치, 행정,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쿠스코에 건설된 광장과 궁전, 황금으로 장식된 정원 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침략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 이 무참히 살해되고 엄청난 보물이 사라진 지금의 쿠스코는 잉카인들이 살았던 당시와는 많이 다르답니다.

황금의 도시 쿠스코를 점령한 에스파냐군은 엄청난 보물을 빼앗고 잉카인들이 지은 건물을 파괴한 뒤 그 위에 자신들의 건물을 세웠습니다. 오늘날 쿠스코에서 볼 수 있는 광장. 교회, 수도권 등은 에스파냐 사람들이 새롭게 건설한 유적지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주춧돌을 비롯한 잉카 유적 지 일부가 보존되어 있고, 잉카 문화와 에스파냐 문화가 만나 새로운 유적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과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워 파괴와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스페인 침략자들의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이 바로 태양의 신전과 산토 도밍고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피사로와 스페인 군대가 처음 쿠스코에 왔을 때 태양이 반사되어 빛나는 황금의 신전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곧 신전의 안팎을 장식하고 있던 황금을 모두 약탈하고 신전을 부순 자리에 세운 것이 바로 산토 도밍고 교회이다. 너무 견고히 만들어져 부수는 것조차 힘들었다는 태양의 신전은 산토 도밍고 교회 앞에 남아 있는 거대한 신전의 터와 일부 돌담만이 남아 옛 모습을 추측하게 한다. 산토 도밍고 교회 바깥과 내부에 일부 남아 있는 돌담은 스페인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표면까지 정교히 다듬어져 물샐 틈 없이 쌓아 올려져 있으며, 1950년 지진이 일어났을 때 산토 도밍고 교회는 무너졌지만 돌담은 견실했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이다.

태양의 신전 안에는 역시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인 여러 방들과 장식대가 있으며 안뜰에는 축제 때 술로 가득 채워졌다는 우물이 남아 있다. 이와 공존하는 산토 도밍고 교회는 동시대에 지어진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웅장한 바로크 양식에 내부는 아름다운 제단으로 꾸며져 있다. 한편 태양의 신전 터가 남아 있는 앞 광장에는 코리칸차 박물관(Museo de Sitio del Qoricancha)이 있는데 이곳에서 잉카 제국의 유물들과 외과 수술이 행해진 해골들을 볼 수 있다.[다음백과]



San Augustin El Dorad

로레또 골목 Calle Loreto

San Augustin El Dorado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로레또 골목Calle Loreto으로 갔다. 로레토 골목을 빠져나가면 아르마스 광장이 있고, 쿠스코 대성당과 헤수스 교회가 보인다.


쿠스코 대성당

(Cuzco Cathedral)

아르마스 광장의 북쪽에 위치한 대성당은 17세기 바로크 양식답게 오래되었지만 웅장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대성당이 있던 자리는 원래 잉카의 위라코차(Wiracocha) 신전이 세워져 있던 자리로 피사로를 주축으로 한 스페인 침략자들이 이를 부수고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으리으리한 제단과 각종 기물, 그림들이 가득한데 은 300톤을 사용해 만들었다는 대제단과 화려하게 장식된 성상들이 가히 만든 이들의 돈독한 신앙심을 추측하게 한다. 특히 대성당에 있는 여러 성상 중에는 원주민을 닮은 검은 예수상이 유명한데 페루의 여러 축제 중 가장 큰 축제인 부활절 세마나 산타 축제 때 검은 예수상을 성당 밖으로 내어 거리를 순회하는 행사가 펼쳐진다. 그 밖에도 이곳에 걸려 있는 ‘최후의 만찬’ 그림에는 다빈치의 그림과 달리 쿠이와 치차를 먹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배신자인 유다의 얼굴 대신 침략자 피사로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성당을 주축으로 왼쪽에는 헤수스 마리아(Jesús Maria) 성당과 오른쪽에는 엘 트리운포(El Triunfo) 성당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데, 이 중 엘 트리운포 성당은 1536년에 지어진 쿠스코 최초의 성당이다. 입장은 헤수스 마리아(Jesús Maria) 성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다음백과]

12각돌 가는 길목


12각의 돌

La Piedra de Los Doce Anguios
잉카의 정교한 건축 솜씨를 엿보려면

잉카 제국의 발달된 여러 문명과 기술 중에서도 정교한 건축 솜씨는 익히 잘 알려진 사실로 이를 가장 대표적으로 잘 나타내주는 것이 바로 잉카의 돌담이다. 조그마한 틈새조차도 허용하지 않고 아귀를 맞추어 촘촘히 쌓아 올린 벽은 수백 년의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처음 모습 그대로 요지부동이며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함을 자랑한다. 똑같은 모양의 벽돌을 일렬로 맞춰 쌓는 현대의 방식과 다르게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의 돌들을 조금씩 엇갈리게 쌓으면서도 틈새를 정확히 맞춘 덕에 더더욱 굳건하게 느껴진다. 6각, 8각 등 바위의 생긴 모양대로 각을 맞추어 쌓은 아름다운 돌담을 따라 역시 돌을 깔아 조성한 길 위를 걷노라면 도시 그 자체가 귀한 유적임을 몸소 느끼게 된다. 이 중 가장 많은 각으로 이루어져 여러 돌들과 접착하고 있는 돌이 바로 12각의 돌이다.

부근에 많은 각들로 이루어진 돌들이 여러 개 있어 찾을 수 있을까 조바심이 느껴질 법도 하지만 워낙 명물이 되어 버린 덕에 늘 12각의 돌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위치 : 아르마스 광장 뒤쪽으로 난 길로 가다 보면 아툰 루미위크 거리(Av. Hatun Rumiyoc)에 위치한 종교 예술 박물관(Museo de Arte Religioso)의 벽에 12각의 돌이 있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도보 10분[ENJOY남아메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