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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중국(6)길림성,集安(국내성)장군총(將軍塚),翰林园商务宾馆(吉林성.지린성)(2018.8.8 오후)

여행복사꽃 2023. 5. 7. 20:27

길림성,국내성,장군총(將軍塚),집안(集安,지안,국내성),翰林园商务宾馆(吉林성.지린성)

장군총(將軍塚)은 중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集安市) 퉁구(通溝)의 토구자산(土口子山) 중허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돌무덤(石塚 석총)으로서, 현재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돌무지무덤이다. 산 아래에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고구려의 제20대 태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위키백과]

무덤은 총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이루어져 있고, 평면은 장방형으로서 한 변의 길이는 31.5~33미터이며, 무덤의 높이는 현재 14미터로 아파트 5층 높이에 달한다. 기단(基壇)의 무덤 둘레로 한 변에 세 개씩 호석(護石)이라 하는 적석 밀림 방지석이 배치되어 있는데, 분실되었는지 오직 동변만 가운데 호석 없이 두 개뿐이다.

정부(頂部)는 만두형(饅頭形)을 하고 상단부에 1열의 구멍이 있어 정상에 건축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안쪽에는 향당이라 불리는 사당이 있었으리라 추정했지만, 무덤 동쪽에 초대형 제단이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불탑이나 비석이 서 있었을 것으로 보는 추세이다.

안팎 전부를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석축릉으로 구조가 정연하고 규모가 매우 장대하다. 이 묘는 일찍이 도굴당한 듯하여 아무런 부장품이 남아 있지 않으며, 축석분으로서 거의 안전한 모양을 갖추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이다.

내부 구조를 살펴보면, 묘실은 횡혈식으로 벽화가 그려졌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석실의 위치는 높고 밑으로부터 3단째 단을 상(床)으로 하고 있다. 최상단의 상면(上面)과 거의 같은 높이에 장방형의 거대한 1매의 천정석이 있으며, 연도(羨道)는 서남방으로 있으며 천장은 큰 돌 3매로 되어 있다. 현실의 4벽은 6단으로 쌓고 각 벽의 위에는 굵고 모진 기둥을 옆으로 높여서 천정석으로 받치고 있다. 현실의 크기는 가로·세로의 높이가 모두 5미터 이상이며 상(床)으로 오기(基)의 관대(棺臺)가 있으며, 기단의 4주에는 넓이 4미터의 돌을 두르고 자갈로 채워져 있다. 4벽과 천장에는 본래 칠을 하였으며 벽화가 있었던 흔적이 보이나 지금은 전부 박락(剝落)되고 없다. 각 층의 외부에는 기와로 덮었던 것으로 생각된다.[위키백과]

장군총(將軍塚),
1. .개요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적석총, 積石塚). 화강암을 쌓아 만들어서 적석총이라고도 한다. 무덤의 형식은 돌무지 돌방무덤이며, 동방의 피라미드, 금자탑이라 할 만큼 규모가 크다. 한 변이 31.5~ 33 m이며, 높이는 14m. 근처에 있는 다른 고구려계의 무덤, 수도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나마 유네스코의 감독을 받으며 문화유산으로서 보호가 된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이름의 장군은 군대의 지휘자를 이르는 일반명사이고, 총은 연고가 확인되지 않은 무덤을 의미한다. 명칭에 대해서 다소 이야기가 있지만 일본군이 만주에 세력을 뻗친 후에 '장군'에 빗대어 이름을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일 뿐이다. 명문화된 첫 조사였던 1907년 프랑스 동양사학자 에두아르 샤반느가 조사할 때부터 이미 장군총이라고 불렀고, 일제가 편찬한 한국의 문화재도록인 조선고적도보 제1권(1915년 간행)에는 '장군분(將軍墳)'이라고 기재하고 지역민들이 부르던 명칭임을 명기하였다.[6]#

참고로 일반적인 대형 왕릉급 무덤에 대해 지역민들이 장군 또는 ㅇㅇ왕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맥락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대가 청나라 때에 봉금조치로 인해서 역사적 맥락이 끊겨 장군이라는 다소 막연한 명칭을 사용했을 수 있다. 태왕릉과 천추총, 서대총과 같은 소위 네임드들 또한 출토된 유물의 명문이나, 지리적 특징으로 일제강점기 조사 때 붙여진 것이다. [7]

비슷한 예를 보더라도 성주군에 소재한 성산동 고분군도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때부터 조사되었던 고분군이다. 예로부터 성산동 고분군에는 팔장군묘라는 이름의 무덤이 있었고 이는 일제에 의해서 작명된 고분이 아니라 지역민들이 사용하던 명칭을 고스란히 사용한 사례이다. 이거 말고도 이처럼 동네의 거대한 봉분을 갖는 무덤에 대해서는 으레 왕, 장군과 관련된 명칭과 설화가 전하는 역사적, 민속학적 차원의 사례가 많다.[나무위키]

2. 무덤의 구조
장군총은 적석총의 구조상으로 가장 완성된 형태이자 적석총 변화의 마지막 형태로 보고 있다. 장군총은 논자마다 용어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보편적으로 계단식석실적석총[8]으로 분류되고 있다. 세부 제원은 상술.

장군총은 현재까지 조사결과 장군총을 비롯, 배총 2기, 추정 제사시설 1기, 배수구 1기, 추정 부속 건물지 등이 확인되어 능원(陵園)을 갖춘 구성으로 추정하한다.

장군총은 강돌을 깔아 기초부로 삼고 가공된 화강암으로 기단을 형성한 후 그 위로 계단 7곳을 구성하여 석재를 쌓아갔다. 장군총에는 석재 1146매를 사용해 외면을 구성하였고 내부를 강돌로 채웠다. 특히 장군총에 사용된 석재들은 태왕릉의 석재 가공도보다도 더욱 가공되고 대체로 일정한 규격으로 돌을 짜르는 등 한층 규격화되고 정치해진 석재를 사용하였다. 특히 장군총의 가장 밑의 계단인 1단 부분에 사용된 석재는 그 위로 쌓은 다른 계단에 사용된 석재에 비해서 훨씬 크다. 또 1단의 계단에 사용된 석재를 보면 살짝 들여쌓아가면서도 석재가 맞물리는 면에 과속방지턱처럼 턱을 두어 하중으로 적석총의 형태가 어그러지는 것을 방지하였다[9]. 이러한 건축 기법 상에서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장군총을 적석총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이자 완성된 형태로 보는 것이다.

장군총의 매장주체부는 평행고임식의 천장을 갖는 굴식돌방무덤으로 장군총의 밑에서부터 세릴 때, 3번째의 계단 위에 묘실을 두었다.[10] 무덤 현실의 한 변은 543~550 cm 남짓한 정방형이고 높이는 510cm로 집안 통구 고분군 내에서 가장 가공도가 높은 석재를 사용하였다. 먼저 만들어진 태왕릉과 비교하면 장군총이 전체적인 규모는 작아졌지만, 매장주체부만 놓고 보면 2배가량 커졌다.

무덤의 정상부에는 난간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고 난간의 일부도 확인되었다. 이에 연구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한데 단순히 난간이 있다는 설, 나아가 적석총에 계단을 밟고올라가서 제의를 할 수 있었다는 설, 아예 무덤 위에 기와로 형성된 구조물이 있었다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장군총의 주변과 계단의 상면에서 기와나 막새가 출토되는 맥락을 보면 분명 구조물이 있었던 것으로도 볼 여지는 있으나 역시 구체적인 형태와 사용 양상을 추정할 근거는 이 이상으로는 없다.[나무위기]

출처: 나무위키 사진캡쳐

계단 중간에 사람이 서있으니 비교해보면 된다. 사진에 보이는 큰 돌이 바로 장군총의 특징적 요소인 거대한 호분석(護墳石)이다. 호분석이란 무덤을 보호하는 돌이라는 뜻으로 적석총의 구조상 하중이 기단부로 몰리게 되면서 큰 측압을 받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밀림현상을 막기 위한 시설로써 가장 큰 호분석이 높이 4.5 m, 두께 1.9 m에 달한다. 각 호분석의 크기는 평균적으로 태왕릉, 천추총에 이어 세 번째로 큰 호분석을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장군총의 주변으로는 배총이라 불리는 왕의 근신자(近臣者)[12]의 무덤으로 현재까지 2기가 확인되었다. 2호의 상태야 잔존상태가 불량하여 주로 거론되지 않지만 1호의 경우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마치 장군총의 미니어처판과 같은 형태여서 장군총과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2호 배총의 서쪽으로는 이른바 제대(祭臺)라고 불리는 추정 제사시설이 위치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물질증거로도 제사와 관련된 시설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연접된 적석총의 기초부라는 견해도 있으나 마찬가지로 명확히 알 수 없다. [나무위키]

3. 무덤의 주인
정식 명칭은 우산하1호분(禹山下一號墳, JYM0001이며, 인근에 있는 태왕릉보다 정제된 형태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장수왕릉(長壽王陵)이라고 알려졌다. 태왕릉에선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광개토왕의 능이라는 의견이 많고 무덤 축조 양식이나 기술적으로 후대의 것이 확실한 장군총은 장수왕릉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이라는 설도 있다. 이쪽이 일반적으로 광개토왕릉이라고 알려진 태왕릉보다 광개토왕릉비로부터 거리는 멀지만 방향은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태왕릉은? 장군총이 광개토왕릉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 중 다수는 고국원왕릉으로 여긴다. 드라마 태왕사신기, 광개토태왕 등으로 인해 오해는 많지만, '태왕'이라는 호칭을 쓴 고구려 임금은 광개토왕 외에도 다수 존재한다. 또 태왕릉=광개토왕릉설의 다른 근거로는 2003년 무덤 근처에서 수습된 '신유년 호대(태)왕(辛卯年 好大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방울[15]인데, 앞에 호(好) 자를 붙인 고구려 임금은 한둘이 아니다. 2019년에 발표된 자료에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였으므로 장수왕릉은 평양에 있으리라고 본다.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평양에서 보낸 장수왕이 죽었으면 당연히 평양에 매장했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설들에 대한 재반박으로 장수왕릉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먼저 평양이 아닌 집안(국내성)에 장수왕의 무덤이 있는 이유를 이것이 북위의 효문제의 예시를 들어 수릉(壽陵), 즉 살아 있었을 때 만든 무덤일 수도 있다 설명한다. 또 장군총 광개토왕릉설의 주요한 근거인 방향 문제는 2000년대 중국 고고학계의 조사보고서가 장군총과 태왕릉의 동북쪽과 동쪽 방향(즉 태왕릉의 경우는 광개토왕릉비 방향)에 제단으로 추정되는 석축이 발견돼서, 태왕릉의 방향 문제에 반론을 제시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태왕릉의 정면은 제단 쪽이고, 광개토왕릉비와도 방향이 일치한다는 것이다.[16][17]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무덤 관련 논쟁은 처음 태왕릉이 발견된 1906년때부터 끊이지 않던 떡밥이었고, 오늘도 역사학자들은 이 무덤들의 피장자가 누구인지 마르고 닳도록 논쟁한다. 다만, 장군총이 장수왕릉이고 태왕릉이 광개토왕릉이란 주장이 더 많은 학자들에게 지지를 받는다. 참고로 북한과 중국 학계는 이 문제에서는 다수설로 거의 일치한 실정이다.

다만 한국에는 장군총을 고구려 시조묘로서 신전과 같은 상징적인 의례를 거행한 공간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이쪽 학자들은 장군총이 사람을 장사 지내기보다는 어떤 제례를 치르기에 더 적합한 구조이고, 삼국사기 등에 묘사된 고구려의 제천의식인 동맹 같은 행사를 수행하기에 적당하다고 여긴다.[나무위키]

▼翰林园商务宾馆

중국 지린성 퉁화시 둥창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