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서유럽

2018프랑스(2)루브르박물관내부(8.14)

여행복사꽃 2023. 1. 31. 23:28

-파리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세계 3대 박물관 루브르박물관(내부)

▼루브르 박물관

Musée du Louvre

파리에 있으며, 원래는 12세기에 필리프 2세가 지은 궁전이었다. 1546년 프랑수아 1세가 그 터에 루브르 궁전을 지었고, 그뒤 수세기에 걸쳐 많은 증축과 개조가 이루어졌다. 1793년 혁명정부가 국립중앙미술관을 설치·공개했다. 루브르 박물관은 강을 따라 뻗은 남쪽 화랑과 4각형 안마당을 둘러싼 궁전의 4면을 차지하고 있다. 1980년대에 예술품 전시를 위한 공간 확보를 위해 대대적인 개축작업을 했다. 각종 편의 시설을 위한 지하단지가 조성되면서 그 단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미국 건축가 I.M. 페이가 설계한 유리 피라미드가 자리잡았다.
루브르는 BC 7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사모트라케의 승리>·<밀로의 비너스>·<모나리자> 등이 있다.[다음백과]

파리에 있는 12세기 존엄왕 필리프 요새지 오른쪽 기슭에 지어진 커다란 궁전의 일부이다. 1546년 예술품 수집가 프랑수아 1세가 이 낡은 성곽을 부수고 그 터에 새로운 왕궁인 루브르 궁전을 짓기 시작했으며 뒤이어 거의 모든 왕들이 증축해왔다. 오늘날의 루브르 중 일부는 프랑수아 1세 때 건축가 피에르 레스코의 감독하에 완성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카레 궁 남서쪽 부분이며, 대부분의 루브르 건축시설은 그뒤 17세기 루이 13, 14세 때 추가 조성된 것이다.

루이 13세 때 리슐리외 추기경이 왕을 위해 뛰어난 예술작품들을 수집했고, 루이 14세와 그의 대신 마자랭 추기경은 영국 찰스 1세의 소장품을 포함한 훌륭한 예술품들을 수집했다. 건축가 클로드 페로와 루이 르 보, 실내장식가이며 화가인 샤를 르 브룅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루브르 왕궁 중 콜로나드[柱廊] 부분을 설계했다. 1682년 루브르는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왕실을 옮김에 따라 폐궁되고, 18세기 들어서 이곳을 공공박물관으로 쓰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당지비에 백작이 대 전시장의 건축과 설계를 지원하고 중요한 예술작품들을 계속해서 모아들였다.

1793년 혁명정부가 대 전시장에 국립중앙미술관을 설치·공개했다. 나폴레옹 통치하에서는 카레 궁과 리볼리 가(街)를 끼고 북쪽 파빌리온에 잇댄 건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하면서 19세기에 서쪽으로 뻗은 전시장들과 파빌리온들을 거느린 2개의 주요 윙(wing:건물의 옆으로 뻗은 부분)이 완성되고 후에 나폴레옹 3세가 그것들을 전시장으로 개관시켰다. 완성된 루브르는 2개의 4각형 본관과 그것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2개의 커다란 정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물 복합체이다.

1980년대에 들어 루브르는 방문객들의 접근과 편의에 더욱 이바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축작업을 개시했다. 이로써 강당, 관광버스 주차장, 식당, 사무실, 상점, 전람실, 창고, 주차장 등을 수용한 거대한 지하단지가 나폴레옹 궁과 카루젤 궁의 중앙 정원 밑으로 조성되었다. 이 단지로 들어서는 지면 높이의 입구는 나폴레옹 궁 중심에 있으며, 그 위쪽에 미국 건축가 I.M. 페이가 디자인한 강철과 유리로 된 피라미드가 자리잡고 있다. 1989년 부대시설과 대중오락시설을 갖춘 지하단지가 문을 열었다.

루브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그림을 소장한 미술관 중의 하나이며, 이들 작품은 인상파에 이르기까지 유럽 모든 시대를 대표하고 있다. 여기에 소장된 15~19세기 프랑스 그림들은 세계 최고이며,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화가, 바로크 시대 플랑드파, 네덜란드 화가들의 걸작도 소장되어 있다.

중세·르네상스·현대 예술품 전시장에는 프랑스 왕들의 보물 등이, 그리스·로마 고대미술품(에트루리아 예술품 포함)에는 건축물·조각품·모자이크·청동제품·장신구·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 고대예술품 전시장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당시 가져온 수집품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기 위해 1826년에 세워졌다. 동방 고대예술품 전시장은 메소포타미아 예술품을 소장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1954년 그리스도교 고대예술품부가 설치되어 상아제품·유리·도자기·직물·금제품 및 그리스와 러시아의 성상을 포함하여 초기 그리스도교와 비잔틴, 콥트 예술작품들이 분류·배치되었다.[다음백과]


벨레트리의 여신 또는 벨레트리 팔라스
The Athena of Velletri or Velletri Pallas

▲벨레트리의 아테나 (또는 벨레트리 팔라스) The Athena of Velletri or Velletri Pallas
크레실라스 (Kresilas) 복제품

기원전 430년 경에 크레실라스 (Kresilas, 기원전 5c 그리스 조각가)가 제작한 원작(브론즈 조각으로 추정)은 분실되고 로만 복제만 남아 있다.

높이 3m가 넘는 거대한 이 로만 복제는18세기 말에 벨레트리 근처에서 발견됐다 해서 벨레트리의 아테나 또는 벨레트리 팔라스라 부른다.

1797년, 이탈리아 예술품 발굴가(보물찾기 전문가?)인 파세티(Vicenzo Pacetti)가 조그만 이탈리아 마을인 벨레트리 근처에 다 내려앉은 로만 빌라에서 이 냥반을 찾아 냈다.

헬멧과 가슴 중앙의 메두사를 일부 복구 수리해서 프랑스 고관한테 팔았다. 이 프랑스인은 얼른 로마로 옮겼는데 나폴리군이 압수해서 나폴리 왕실 콜렉션에 안치했다. 그러나 양국 협상 끝에 1798년 소유자인 프랑스로 넘어갔다. 루브르에서 전시를 시작한건 1803년 12월 부터이다.[구글검색편집]

▲크라실라스 Kresilas
( 480 - c. 410 BC)는 키도니아에서 고전 시대 (5th century BC)의 그리스 조각가였다. 그는 Argos에서 훈련을 받았고, Peloponnesian War의 시간에 Athens에서 근무했다. Myron의 이상적인 초상화의 추종자. 그는 고린도 헬멧과 함께 그의 동상 Pericles에 대해 가장 잘 알려져있다.[영어위키번역]

Kresilas (Greek: Κρησίλας Krēsílas; c. 480 – c. 410 BC) was a Greek sculptor in the Classical period (5th century BC), from Kydonia. He was trained in Argos and then worked in Athens at the time of the Peloponnesian War, as a follower of the idealistic portraiture of Myron. He is best known for his statue Pericles with the Corinthian helmet.

▼Statue of Athena
그리스 아테네의 조각상

▲그리스 로마 신화 주인공들 동상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페이디아스의 동상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은 그리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에 세워진 거대한 신상으로, 그 높이가 무려 13m나 되었고, 유명한 그리스 조각가 피디아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위키백과]

예술가: 페이디아스
완공: BC 435년
착공 날짜: BC 466년
높이: 13m
재료: 금, 상아, 청동, 흑단


▼아레스 Ares

▲ 로마 신화에서 동일시되는 마르스와 달리 아레스는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았다. 단지 전쟁과 학살의 혐오스러운 측면과 유혈의 욕망을 상징했으며, 주로 무장을 갖춘 전사의 전형으로 묘사된다.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로 알려졌는데, 다른 신들이나 부모인 제우스와 헤라는 아레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누이인 에리스, 두 아들인 포보스와 데이모스는 그를 따랐다고 한다.
아레스 숭배는 주로 그리스의 북부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스파르타에서는 전쟁 포로들을 아레스에게 제물로 바쳤고, 테게아에서는 여자들이 특별한 제물을 바쳐 그를 찬양했다.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기슭에 그의 신전이 있었다.
관련 신화는 많지 않지만 스파르타에서 전쟁의 신이었던 아프로디테가 그의 아내였고 둘 사이에서 데이모스와 포보스, 하르모니아가 태어났다고 한다.[다음백과]



▼보르게세의 비너스 Vénus Borghèse

보르게세의 비너스(Vénus Borghèse)는 2세기 로마의 대리석 조각으로, 그리스 원본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를 모방한 것입니다. 이전에 보르게제 컬렉션에 있던 이 작품은 1861년 나폴레옹 3세가 구입한 덕분에 1863년부터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 되었습니다 . 수반되는 큐피드와 돌고래는 둘 다 비너스의 고전적인 속성이지만 아마도 로마의 필사자가 추가된 것 같습니다. [위키백과]

위치: 스핑크스의 궁정 - 419호실 ( d ) , 344호실 - 고전 및 헬레니즘 그리스 미술


▼아를의 비너스(Vénus d'Arles)

▲아를의 비너스는 프랑스 아를의 고대 로마극장을 발굴할 때 벽감 안에 여성상으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발견 당시에 오른팔은 완전히 사라졌고 몸통에 가까운 왼팔 일부만 남아 있었습니다.
17세기 루이 14세 시절에 발굴된 후 양팔은 왼손에 거울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머리를 빗고 있는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따라서 조각이 제작된 BC 360년경 당시 모습은 아닙니다.[구글검색편집]

밀로의 비너스 Venus de Milo

아프로디테를 묘사한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

▲밀로의 비너스(영어: Venus de Milo, 프랑스어: Vénus de Milo, 그리스어: Αφροδίτη της Μήλου)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인 아프로디테(로마 신화의 비너스)를 묘사한 대리석상으로 길이는 203cm이다.이 작품은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이다. 이 조각상은 1:1.618의 황금 비율이며 8등신이다. 이 작품은 두 팔이 없지만 전문가들은 다양한 연구로 왼팔은 사과를 꽉 잡고 있는 형태였고 오른팔은 배에 있는 흔적으로 흘러내리는 옷을 잡고 있는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3대 작품이라고 선정 될 만큼 그 예술성이 위대하다고 평가된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4월 8일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밀로스섬의 농부 요르고스 켄트로타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며칠 후 프랑스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 쥘 뒤몽 드위빌(Jules Dumont d'Urville)이 이 조각상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샤를 프랑수아 드 리파르도(Charles François Riffardeau de Rivière)를 설득해 조각상을 구입했다. 이 조각상은 1821년 루이 18세에게 헌납되었고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21년 당시의 모습을 드로잉 한 스케치도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왼팔이 좀 더 남아있는 모습이다.[위키백과]


카리아티드의 방
The Caryatids by Jean Goujon (1550–1551) in the Salle des Caryatides of the Louvre(루브르의 카리아티드 홀)

▲루브르 박물관의 Caryatids의 방: Caryatides 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어로 " Karyai의 소녀들 "을 의미 합니다. Cariés 는 여신 Artemis Karyatis에게 바쳐진 그리스 사원에서 젊은 처녀들이 머리에 갈대 바구니를 이고 춤을 추던 Peloponnese ( Laconia 지역) 의 고대 도시 였습니다.

로마 건축가 비트루베 (기원전 80년~기원전 15년)에 따르면 사원 의 장식 요소로서 카리아티드의 표현 은 페르시아 침략자들과 동맹을 맺은 후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카리에스 인구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그리고 이 배신 때문에 남자들은 학살당했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어 주인을 위해 무거운 짐을 나르도록 강요당했습니다.[구글검색]

▲Jean Goujon의 조각 Henry IV 벽난로.



▼에로스를 등에 태운 켄타우로스

사람과 말이 합쳐진 신화의 생물

▲켄타우로스(그리스어: Κένταυροι)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수인(비스트맨)이자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말인 상상의 종족의 일종이다. 몸에서 말의 부분은 태양에 속하는 남성적인 힘을 나타내며, 이 힘을 다스리는 상반신을 이루는 사람 부분에 있다. 요컨대 켄타우로스는 덕성과 판단력이라는 인간의 고귀한 본성과 대비되는 인간의원초적인 에로스적 본능을 상징한다.

켄타우로스는 그리스 중동부 지역인 테살리아의 왕 익시온의 후예들이라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어느 날 올림포스 산으로 가서 신들의 잔치에 동석한 익시온은 그 곳에서 헤라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되었는데, 이를 눈치 챈 제우스가 그에게 헤라의 모습을 본떠서 만든 구름을 가져다 주었다. 익시온은 구름을 헤라로 알고 몸을 섞었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게 바로 켄타우로스이다.

켄타우로스는 대초원에 무리를 지어 사는데, 대부분 성질이 난폭하고 음탕하다. 55살까지 살 수 있으나 대부분 40살이 되면 죽는 이유는 피살되거나 전사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난폭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술을 너무 좋아하여 종종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기도 한다. 그래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추종자 대열에 합류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켄타우로스가 저지른 비행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테살리아 왕의 결혼식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이야기이다. 사람들과 곧잘 사귀었던 켄타우로스들은 결혼식에 하객으로 초청받았었는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몇몇이 술에 만취해 신부에게 모욕을 주고 행패를 부렸다. 이를 빌미로 인간과 켄타우로스 간에 혈투가 벌어졌다. 결국 싸움에서 진 켄타우로스들은 테살리아를 떠났으며, 남아있던 자들은 훗날 헤라클레스에 의해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모든 켄타우로스가 호전적이고 난폭한 건 아니다. 케이론이라는 켄타우로스는 의술, 음악, 수렵, 예언에 능통하였으며, 결코 죽지 않는 불사의 운명을 타고났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남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케이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영웅(헤라클레스 등)들을 자신의 제자로 두었다. 케이론은 의술이 뛰어나 죽은 사람도 소생시켰기 때문에 명계의 왕인 저승의 신 하데스로부터 분노와 원망을 샀다. 그 결과 케이론은 하데스의 청탁을 받은 제우스가 쏜 독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제우스는 불사의 케이론이 영원히 상처의 고통을 받는 것에 연민을 느껴 그를 황도 12궁의 궁수자리, 즉 켄타우로스자리로 만들었다.[위키백과]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Sleeping Hermaphroditus)는 헤르마프로디토스가 잠자는 모습을 등신대로 조각한 대리석 조각이다. 고대적 물건이라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1620년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침대를 조각해 그 위에 올려놓은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현재는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위키백과]

▲헤르마프로디토스(고대 그리스어: Ἑρμαφρόδιτος [hərˌmæf.rəˈdaɪ.tə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두 신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따르면 본래 미남자였으나 물의 요정 살마키스와 융합하여 반남반녀 양성구유의 몸이 되었다. 암수한몸을 의미하는 용어인 "헤르마프로디테"(hermaphrodite)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양성성 또는 남성의 여성성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로마 시대의 예술 작품에는 남성의 성기가 달린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한 테오프라스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결합하여 결혼을 상징하기도 한다. 헤르마프로디토스가 결혼을 상징한다는 해석에서는 그(녀)의 부모가 신부를 축복하는 역할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2]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이름은 부모인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이름이 결합된 것이다. 이 3명의 부모자식은 모두 관능과 풍요와 관련된 모습을 보이며, 명백한 성적 함축성을 보유하고 있다. 거대한 남근을 가진 생식력의 신 프리아포스 역시 일부 기록에 따르면 헤르메스의 자식이라고 하고, 성욕의 신인 에로스도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의 아들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비롯한 많은 예술작품들이 헤르마프로디토스를 소재로 삼아 창작되었다.[위키백과]


앙리 2세 계단

출처: 인터넷 사진 캡쳐


▼ 루브르의 브론즈 궁전 Salle de Bronzes의 천장화(2010년에 설치 완료 개장)

▲루브르 궁전의 32번 방인 청동의 브론즈 방(Salle des Bronzes)은 1550년대에 축성되었다. 이 방에는 청동 작품, 귀금속, 월계수가 금으로 장식된 천 가지가 넘는 고전 작품이 전시된 곳이다. 그런데 이 방의 천장은 미국의 낙서화가 '사이 톰블리(Cy Twombly)가 그린 프레스코화이다.

이 거대한 청동의 브론즈 방(Salle des Bronzes)의 천정은
기원전 500년 파르테논 신전을 조각한 그리스의 조각가 페이디아스 (Phidias)에서부터 기원전 350년경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을 조각가 프락시텔레스(Pra xiteles)에 이르기까지 헬레니즘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들의 이름으로 장식되어 있다.[구글검색편집]


싸이 톰블리(CY TWOMBLY의 생애

미국 버지니아 렉싱턴에서 태어난 트웜블리는 1950년대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랙마운틴 대학에서 미국의 전설적인 예술가로 꼽히는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션버그와 함께 공부했고, 1959년 이탈리아로 이주해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트웜블리는 그림과 낙서 드로잉, 캘리그래피를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 조르주 브라크 이후 처음으로 파리 루브르 박물관 천장에 그림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위키백과]


▼루브르 드농관 Denon wing, 1층, 66번 전시실, 아폴로 갤러리 Galerie d'Apollon

▲루브르 드농관(Denon wing) 아폴로 갤러리(Galerie d'Apollon)는 높은 천정에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손잡이와 벽 장식은 황금으로 꾸며져 있고 중앙에는 왕실 왕관이 유리 벽안에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개를 쳐들고 아폴로 갤러리 천장화를 본다.
1661년에 프랑스 궁정화가 샤를 르브룅 (Charles Le Brun)이 꾸민 이 '왕의 갤러리 G alerie des rois'는 미완으로 남아있었는데, 1851년 프랑스 최고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 루아 Eugène Delacroix기 완성을 했다.[구글검색편집]


▼Apollo Gallery - Louvre - Le Brun - Tapestry

샤를 르브룅 프랑스 화가

▲루브르 궁전의 갤러리 다폴롱에 위치한 Manufacture des Gobelins에서 제작한 태피스트리, Charles Le Brun(1619 – 1690)을 대표하여 G. Greliche에 의해 처형됨 앙제의 미술[위키백과]


루이 15세의 왕관 Couronne de Louis XV

▲루이 15세의 왕관은 1722년 젊은 왕의 대관식을 위해 의뢰되었습니다. 비록 그 이전에 다른 프랑스 군주들이 이미 왕관을 사용했지만, 그들이 죽으면 왕관 은 생드니 수도원의 대성당에 기증되었습니다 . 프랑스 왕과 그들의 부인들의 시신이 묻혔습니다. 그러나 루이 15세가 죽자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루이 16세는 할아버지의 왕관을 자신의 대관식에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따라서 왕관의 가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는 그것을 사용한 18세기 의 마지막 군주였으며 나폴레옹이 그의 대관식을 위해 화환을 사용했기 때문에 다시 샤를 10세에 의해서만 재사용되었습니다.

1885년 공화당 정부가 대부분의 프랑스 왕관 보석을 판매하면서 루이 15세의 왕관은 앙시앵 레짐 과 관련이 있더라도 역사적 관련성으로 인해 아껴졌습니다 . 컬러 크리스탈.[위키백과]


사모트라케의 니케
Victoire de Samothrace

조각의 발굴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 드농관의 큰 계단 난간에서서 많은 관람객들의 주목을 받고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Winged Victory of Samothrace)>은 <사모트라케의 니케(Nike of Samothrace)>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863년 터키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의 프랑스 부총독 샤를 샹프와조(Charles Champoiseau)가 에게해 북서부의 작은 섬 사모트라케에서 이 거대한 조각의 파편 100여 점을 발굴했다. 이 작은 조각들에는 머리와 팔 부분은 없는 상태였으며 1950년경에 한쪽 손이 발견되었다.[네이버지식백과]

니케의 기원과 의미
날개를 단 여신 니케는 티탄족(Titans)의 딸로 팔라스(Pallas)와 스튁스(Styx) 사이에서 태어났다. 질투를 의미하는 젤로스(Zelos), 힘을 뜻하는 크라토스(Kratos), 폭력을 상징하는 비아(Bia)의 남매이기도 하다. 니케는 거인 기간테스와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인 기간토마키아에서 제우스 편을 들면서 승리의 여신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니케의 이미지는 그리스 미술에서 특별한 존재로 전통적으로는 전쟁, 운동경기, 시정논쟁에서의 승리와 관련이 있다.[네이버지식백과]

조각이 있던 위치
니케 상은 사모트라케 섬의 돌로 된 벽감(niche)에서 돌로 만든 전함의 뱃머리 부근에 서 있었는데 신전(Sanctuary of the Great Gods)을 내려다보는 위치였다. 조각 아래에 있는 호수에 상이 비친 모습은 전함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출항하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한다. 거대한 조각이 있던 위치를 통해 작품은 왼편 앞 부분에서 보여지도록 만들었을 것으로 논의되었다. 이는 조각 왼쪽과 오른쪽의 기교적 불균형을 해소해주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네이버지식백과]

작품의 특징
이 조각상은 헬레니즘 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이다. 기울어진 날개의 각도, 왼쪽 다리의 위치, 바람이 불어 여신의 다리를 휘감은 듯한 옷의 표현은 조각을 보는 사람들에게 상이 날아오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뒤틀어진 여신의 몸은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 고전기 조각들처럼 물에 젖은 듯한 얇은 옷 사이로 드러난다. 이는 니케 상을 만든 조각가의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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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 상의 머리와 팔 부분은 없고 1950년에야 발견된 손은 니케 여신의 상징물을 잡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상이 제작된 시기, 미술가, 제작 배경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페르가몬의 조각들과의 양식적 유사성이나 제작 배경을 통해 제작 시기를 추론하고 있다. 조각을 발굴한 지역에서 찾아낸 도기들은 이 상과 에게해 동남쪽의 섬, 로도스(Rhodes)와의 연관성을 지적해준다. 또한 로도스의 마지막 해전은 기원전 190년경이었는데 로도스인들이 니케를 그들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면 그 시기가 일치한다. 뱃머리와 조각상 아래 부분에 사용된 회색 대리석이 로도스섬에서 나왔다는 점도 이 시기라고 추정하는 근거이다. [네이버지식백과]


▼카나의 결혼식(Les Noces de Cana)

▲ 카나의 결혼식(Les Noces de Cana) 베로네즈라고 불리는 파올로 칼리아리가 그린 작품으로 루브르에 전시된 작품 중에 가장 큰 규모의 작품이다. 폭이 거의 10m에 가까운 크기의 이 그림엔 130명이 등장하는데 베니스 회화의 거장들을 음악가로 등장시켰다. 이 그림의 주제는 가나의 결혼식인데, 배경은 마치 베니스의 한 연회처럼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나의 결혼식은 아주 가난한 결혼식이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말을 하고 있는 인물은 한 명도 없지만 마치 음악소리가 들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우측에 노란 옷을 입고 있는 남자가 항아리에 붓고 있는 물의 색이 붉은 것으로 보아 예수의 첫 번째 기적,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포도주는 미사 중에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 곧 성찬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다음백과]


▼성 세바스챤(Saint Sebastian) 1400년대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캔버스의 Tempera & Oil, 140x255cm, Louvre

▲7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을 때, 사람들은 죽음으로 부터 살아난 세바스찬을 치유의 성인으로 숭배하며 흑사병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신의 분노로 역병을 옮기는 것을 화살로 생각해서 세바스찬을 종교화 그림으로 그리게 되었다.[구글검색편집]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Le Sacre de Napoléon)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Le Sacre de Napoléon)은 자크루이 다비드가 1805년부터 1807년까지 제작한 그림이다. 루브르 박물관 소장.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은 제정(帝政)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네 개의 초대작(超大作)을 명했는데, 다비드는 《생 드 마르스에서의 군기 수여식》과 이 《대관식》을 완성시켰다. 의식은 1804년 12월에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로마에서 교황 비오 7세가 초청되었다. 황제는 월계관을 쓰고 앞으로 나와서 꿇어 앉은 황후 조제핀 드 보아르네에게 바야흐로 왕관을 주고 있다. 가운데 깊숙이 들어간 높은 곳에는 황제의 모친이 그려져 있고, 한 단 낮게 장군과 고관들이 줄지어 있는데 좌우에 줄지은 수많은 인물도 정확한 초상으로서 그려져 있다.[위키백과]

▼모나리자(Mona Lisa)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피렌체의 부호(富豪)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를 위하여 그 부인을 그린 초상화.

모나리자(Mona Lisa)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 1503~06년 제작 나무판 위에 유채 77×53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작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종류 패널화
크기 77×53㎝
제작년도 1503∼1506년
소장 루브르박물관



유채(油彩) 패널화로 크기는 세로 77㎝, 가로 53㎝이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라 조콘다(La Gioconda)라고도 한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 리자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조콘다의 부인 이름이다. 조 콘다부인은 G.포지의 조사를 통하여 피렌체의 안토니오 마리아 디 놀드 게라르디니의 딸임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본명은 리사 게라르디니(Lisa Gherardini)이다.

이 작품은 부인의 나이 24~27세 때의 초상이며,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았을 때 이 미완성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었는데, 왕에게 4,000에큐에 팔려 퐁텐블로성(城)에 수장되었다. 때때로 세정(洗淨)도 하고, 광택용 니스를 바르기도 한 관계로 전체에 균열이 생겨 제작 당시의 시원스럽고 여유 있는 필치는 볼 수 없다.

이 초상은 눈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서는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典型)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라는 설, 미완성작이라는 설, 원래 눈썹이 그려졌으나 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 등이 있다. 또 2009년에는 프랑스의 미술전문가가 240메가픽셀의 특수카메라를 사용하여 분석한 결과, 다 빈치는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유약으로 여러 겹을 특수처리하였고, 가장 바깥에 그려졌던 눈썹이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학반응을 일으켜 사라지거나 떨어져나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다 빈치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하여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心氣)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 신기(神技)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기(傳記)작가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숙기인 제2피렌체시대에 해당하는 1503∼1506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風說)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이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일찍이 《모나리자》가 대낮에 루브르박물관에서 도난당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도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범인이 피렌체의 미술상 A.골리에게 팔러 나갔을 때, 골리의 기지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이 그림만큼 친근감을 주면서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작품도 드물다.[네이버지식백과]


▼루브르 박물관을 나오며


▼파리 시내 건물 모습


▼버스를 타고 차창밖으로 본 루브르 박물관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