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서유럽

2018프랑스(3)앵발리드,알렉산더 3세 다리(Alexandre III)(8.14)

여행복사꽃 2023. 2. 5. 23:04

앵발리드(Invalides)

앵발리드(Invalides)는 파리의 역사적 건축물 중 하나이다. 1671년 루이 14세가 부상병을 간호하는 시설로 계획하고 리베랄 브뤼앙(Libéral Bruant)이 디자인을 지휘하여 1674년부터 부상병들이 간호를 받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건설은 1677년에 시작되었고, 1706년에 완성했다. 돔 교회의 지하 묘소에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의 관이 중앙에 놓여있다. 또한, 주위에 나폴레옹의 친족이나 프랑스의 유명한 장군의 묘가 놓여있다.[위키백과]

군사박물관, 군사입체모형박물관, 해방훈장 박물관, 현대사 박물관, 생 루이 데 앵발리드 교회 등 여러 기념물이 한데 집합되어 있는 파리 최대의 종합전시장.

1670년 루이 14세는 당시 그레넬평야라고 부르던 곳 부근에 앵발리드를 설립했다. 4,000명 가까운 노병들의 생활 근거지가 될 앵발리드는 당시 현역에 복무 중인 병사들의 급료 5년치를 징수한 기금으로 이루어졌다. 리베랄 브뤼앙(Liberal Bruant)의 설계로, 이 복합건물의 공사는 1671년 시작되어 1676년 완공되었다. 에스플라나드는 로베르 드 코트(Robert De Cotte)가 레이아웃한 것이었다. 쥘 아르두앵 망사르(Jules Hardouin Mansart)가 설계한 돔 공사는 1706년 시작되었는데, 1708년 그가 죽었기 때문에 드 코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를 습격할 때 군중들이 사용한 무기의 대다수는 그날 아침 앵발리드로부터 탈취한 것이었다. 경비병의 저항이 있었지만 군중들은 다수의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지하에 있던 무기고로 들어가 약 2만 8000정의 무기를 탈취했다.

그러나 앵발리드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40년 나폴레옹의 유해가 돌아와 그곳에 안장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 국왕이었던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는 영국 정부와 7년간에 걸친 협상 끝에 세인트헬레나로부터 황제의 유해를 이장하는 허가를 받았다. 황제의 사후 19년이 지난 1840년 10월 8일 관이 발굴되어 2분간 개봉된 뒤 프리깃함 라벨풀호에 선적되었다. 당시 임석했던 사람들은 유해가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르아브르에 도착한 뒤 유해는 센강을 거쳐 파리의 쿠르베부아에 상륙했다. 1840년 12월 15일 국장이 거행되었으며 겨울의 폭설에도 불구하고 영구차는 개선문을 통해 샹젤리제, 콩코르드광장, 에스플라나드를 거쳐 생제롬 교회에 도착하여 비스콘티가 설계한 묘당이 완공될 때까지 임시 안치되었다. 1861년 4월 2일 나폴레옹 1세는 그 교회의 돔 아래에 있는 지하 묘지에 최종적으로 안치되었다.

현재 다양한 행정 사무실과 함께 군사박물관(Musée de l'Armée), 군사입체모형박물관(Musée des Plans-Reliefs), 해방 훈장 박물관(Musée de l’Ordre de la Libération), 현대사 박물관(Musée d'Histoire Contemporaine)과 같은 주요 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황금지붕으로 상징되는 왕실의 돔 교회(Dôme Church) 뿐 아니라 군인들의 교회로 불리는 17세기 예배당 생 루이 데 앵발리드 교회(Église St Louis des Invalides)도 볼 수 있다.[네이버지식백과]


'알렉산더 3세' 다리 Alexandre III

<요약>알렉상드르 3세 다리는 파리 센 강에 있는 다리로서 파리 전체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다리로 손꼽힌다. 에펠탑 구획과 샹젤리제 구획과도 인접한다.

<본문>
다리는 1896년~1900년에 지어진 것으로서 당시로는 최신식의 등과 천사 등을 형상화한 조각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리의 명칭은 프랑스-러시아의 공조를 1892년 성사시킨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3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다리의 초석을 내린 사람은 그의 아들이었던 니콜라이 2세였다.

다리의 건설은 19세기 기술이 결집된 것으로서 6미터의 높이로 지어져있다. 철제 다리로서 아치 형으로 뻗어 있으며 실은 다리가 샹젤리제와 앵발리드의 경관을 해치지 않도록 건축이 고려된 것이었다.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 당시 축하 행사의 일환으로 다리의 완공식이 열렸으며 건축은 르살과 알비라는 기술자가 맡았다고 전한다. 이에 알렉상드르 3세 다리는 프랑스 내에서도 역사적인 기념물로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위키백과]

알렉상드르 3세 다리는 파리의 센 느강을 가로지르는 수 많은 다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 나로 꼽힌다. 32개의 아름다운 가 로등이 빛나는 야경은 황홀하기 그지 없으며,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 는 아주 늦은 밤에 이 다리 위를 걷 는다면 아주 특이한 경험이 될 것 이다. 파리의 연인에서 야경이 멋 있던 다리가 바로 이곳이다.

센느강의 북쪽으로는 '그랑빨레 Grand Palais'와 ‘쁘띠 빨레 Petit
Palais'를 지나 '샹젤리제 거리 Champs-Elysées'와 면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나폴레옹 1세‘의 무덤과 군사 박물관으로 이용되는 ‘앵 발리드 Invalides’와 면해있기에,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하여, 단 하 나의 아치로 센느강을 가로 지르는 길이 107미터에 40미터의 너비로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1892년 러시아 황제는 다시 한번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맺게 되고, 4년 뒤인 1896년 10월 7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Nicolas II'가 파리를 방문하여 양 국간의 우호 관계가 돈독하다는 표시로 이 다리 건설에 머릿돌을 놓 았다. 다리의 이름은 황제의 부왕 인 '알렉산더 3세 Alexandre III'로 정해졌으며, 1900년도 만국 박람 회에 즈음하여 '에밀 루베 Emile Loubet'에 의하여 완공되었다.

이 다리가 유난히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다리 네 구석의 17미터 의 탑 위에 설치된 금 도금된 조각 Charlemagne', '근대의 프랑스 La France Contemporaine', '르 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La France de la Renaissance', '루이 14세 시대의 프랑스 La France de Louis XIV'를 표현한 조각 때문일 것이다. 이 조각들은 각각 '과학 Sciences'과 '예술 Arts' 그리고

'상업 Commerce’과 ‘공업 Industrie'을 상징하는 것들로서 날개 달린 천마 ‘페가수스Pégases’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기 둥의 아래에는 '샤를르마뉴 시대의 프랑스 La France de Louis XIV'를 표현한 조각이다.

다리 중앙의 아치의 연결키를 감 추고 있는 측면의 조각은 '헤시퐁 G. Récipon'이 만든것으로, '루브 르 박물관'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파리의 문장을 들고 있는 센느강을 상징하는 요정과, '에펠탑' 쪽에는 러시아의 문장을 들고있는 '네바 Néva'의 요정을 상징하는 조각이 보인다.[구글검색]